영화 속의 도시, 그리고 도시 속의 건축 <뉴욕>
임동우
광란의 도시 뉴욕
2년 간의 연재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영화와 도시, 그리고 어떠한 건축가를 소개하여야 할까 고민이 많았지만, 순간 뉴욕을 아직까지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의외로 쉽게 마지막 글의 소재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 동안 이 글을 통해 필자가 10년 넘게 살고 있는 보스톤을 시작으로 해서 많은 도시들을 돌아다녔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막상 보스톤과 지척 거리에 있는 뉴욕을 빼 놓고 있었다니, 이 연재의 제일 좋은 소재를 잊고 지나갈 뻔 했다. 헌데, 또 막상 뉴욕을 마지막 도시로 소개를 하자고 하니,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뉴욕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기에 조금은 식상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영화가 뉴욕을 배경으로 촬영되었기에, 도대체 어느 영화를 골라야 하나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같은 블록버스터 액션영화는 물론,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SF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같은 드라마, <뉴욕, 아이러브유>와 같은 말랑말랑한 로맨스 영화, 맨하튼이 배경은 아니지만 뉴욕의 교외가 배경인 <나를 찾아줘, Gone Girl> 같은 스릴러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같은 갱스터 영화 등 그야말로 각종 장르의 영화의 배경으로서 손색이 없는 도시가 뉴욕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뉴욕을 선택하고 나서도 어떤 영화를 소개해야 할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특히 뉴욕은 우디 앨런처럼 지극히 뉴욕스러운 영화감독을 배출해 내기까지 한 도시이다. 최근 그는 몇 번의 유럽 외도(?)를 하기는 했지만, 다시금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 <블루 자스민>을 통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디 앨런은 냉소적인 뉴요커들의 모습을 영화에 잘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 스스로가 그렇듯), 사실 뉴욕 혹은 뉴요커는 어떠하다라고 정의내리기 쉽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다. 미국사람들은 뉴욕을 미국의 도시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그만큼 뉴욕은 별종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개인의 경험이나 지식, 배경에 따라서 뉴욕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깊이, 폭이 달라질텐데, 그래서 필자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갱스 오브 뉴욕>을 택하였다.
갱스 오브 뉴욕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만남으로도 유명한 이 영화 (2002년 작)는 일반적인 액션 영화나 <로미오와 쥴리엣>, <타이타닉>으로 유명했던 디카프리오의 부드러운 남성 역할의 영화를 예상했다고 하면, 아마도 기가 막히게 예상을 빗나갔을 것이다. 영화는 잔혹하며 19세기 말에도 야만성이 남아있던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우디 앨런과 함께 유명한 뉴욕출신 감독이다. 태어나기도 뉴욕 퀸스에서 태어나고 학교도 뉴욕대학을 다녔으니, 뉴욕에서 보기 드문 뉴욕 토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택시 드라이버>를 통해 이름이 익숙해졌는데, 이 역시 뉴욕의 밤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40년대 생인 감독에게 있어서 뉴욕은 여전히 혼돈의 이미지가 강하게 심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은 관광객으로 가득찬 타임즈 스퀘어가 1960-70년대까지만해도 윤락업소로 가득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뉴욕이 원래부터 로맨틱한 도시는 아니었던 듯 하다. 사실 60-70년대에는 뉴욕에 대한 비판이 엄청나던 시기이다. 뉴욕은 1920-30년대에 많은 성장을 했는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1930년에 완공되었다), 2차대전 이후 많은 인구가 부를 축적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하여 교외로 이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뉴욕을 비롯한 많은 도시의 구도심이 주말은 물론 주중 저녁에도 (조금 과장하자면)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단지 거리의 부랑자들만 있는) 도시가 된다. 도심은 범죄가 들끓는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건축계에서도 뉴욕과 같은 도시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도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에, 렘 콜하스가 “광란의 도시 뉴욕 (Delirious New York)”이라는 책을 통해, 뉴욕은 새로운 도시의 유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0대 초반에 뉴욕의 미치광스러운 현상을 날카로운 눈으로 분석하고 새로운 시대를 예측한 렘 콜하스는, 이제는 그를 빼 놓고 건축역사를 설명할 수 없는 정도의 건축가가 되었고, 뉴욕은 그의 예상대로 새로운 도시 모형을 제시하며 전세계를 열광시키는 도시로 변모하였다.
이야기가 좀 곁으로 새나갔는데,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면, <갱스 오브 뉴욕>은 렘 콜하스가 보았던 뉴욕보다 100년 전의 뉴욕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인간의 야만성때문이다. 이 영화는 (지금은 다운타운에 속하는) 맨하튼의 Five Point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실제 벌어진 갱들의 알력싸움 (싸움이라고 하기에는 전투에 가까운)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서 사람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짐승의 것과 많이 다르지 않았던 듯 하다. 자신의 권력과 이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생명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이들을 막는 어떠한 법적인 권력도 없었던 것이다.
막상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대부분의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가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내용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그 간단한 내용 이면의 메세지가 힘이 있다. <갱스 오브 뉴욕>은 간단히 얘기하면 권선징악의 영화이다. 갱들의 전쟁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암스테르담 (디카프리오 분)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Butcher Bill (도살자 빌, 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내용의 이면에는 현재 미국이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치부가 그대로 드러나있다. (아마 글이 나가는 시점에는 결정이 나 있겠지만) 요즘 미국에서는 대선후보 중 하나는 이민사회로 인하여 붕괴되는 미국을 지적하고 있고, 또 다른 한명은 그 이민사회가 미국을 만들어 나아가는 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만큼 이민자 문제는 미국에서 중요한 문제인데, <갱스 오브 뉴욕>을 보면 그 문제의 시작을 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은 아일랜드 계 미국인이다. 지금은 보스톤을 비롯하여 미국에서 아일랜드계하면 많은 도시의 정계를 주름잡고 있는 이민자 그룹이지만 (존F케네디도 아일랜드 계이다), 19세기 중반의 미국에서는 이미 터전을 잡고 있던 미국 본토인 (미국 인디언이 아니라 영국계 미국인)에게 괄시를 받던 이민자 그룹이었다. 암스테르담을 죽인 빌은 본토인 (Natives)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지금은 정치적으로건 윤리적으로건 미국의 Native라고 하면 Native Indian (아메리칸 인디언)을 말하는 것 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들이 텃세를 부리며 사용했던 말이 Natives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실제 미대륙의 토착민인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유럽인들의 갈등만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미국의 역사는 이 갈등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나라다. 아일랜드계 이외에도, 이탈리아계, 유대인, 폴란드계, 중국계 등 지속되는 이민자 유입에 이민자와 그 전에 있던 사람들의 갈등은 늘 되풀이된다. 필자가 뉴욕의 이민자들이 생활하던 Lower East의 주거를 연구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심지어는 중국계 이민자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있다고 한다. 중국 본토에서 왔는지, 다른 지역 중국계인지,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계인지 등등을 나눠가며 차별이 존재한다고 하니,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집단인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에서 (영국 이민자 집안 출신인) 빌이 자신을 네이티브라고 하며 이민자 집단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처럼, 지금은 예전에 이민자로 괄시받던 집단이 새로운 이민자 그룹을 괄시하는 역사의 반복이다. 그래서 많은 (백색의) 미국인들은 아시안인을 보면 “어디서 왔느냐”라는 질문을 쉽게 하는데, 이 때 재미난 점은 “원래”라는 말을 붙인다는 점이다. (Where are you from ORIGINALLY?) 다시 말하면, 지금 미국에 사는건 알겠는데, 어디서 이민 온 것이냐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처럼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야 그냥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되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교포2세들의 경우에는 딱히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질문을 한 사람과 연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 같이 미국에 이민온 가족의 후손이라는 면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 처럼 미국의 이민자 역사는 그야말로 정답이 없는 감정의 문제가 큰데, 오늘 다룰 휘트니 뮤지움을 보면 미국의 역사는 역시 이민자들이 세운 역사라는 것을 부인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휘트니 뮤지움 - 미국 예술의 저장소
우리가 흔히 휘트니 뮤지움이라고 부르는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은 말 그대로 미국 예술을 선도하는 미술관이다. Gertrude Vanderbilt Whitney가 1929년 설립한 이 미술관에는 몇 가지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는 본인 스스로 조각가이기도 했던 게르트루드 반더빌트의 배경에 관한 것인데, 그녀는 미국에서 19세기 후반 한 때 가장 부자였던 네덜란드계 이민자였던 반더빌트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는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배경을 보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만만치 않은 재력의 휘트니 가문의 헤리 휘트니를 만나면서, 돈이 아니라 자신의 참 모습을 사랑하는 사랑을 만났다고 고백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이 휘트니 미술관 역시 반더빌트 가문의 딸이 설립하기는 했지만, 남편 가문의 이름을 따 휘트니 미술관으로 이름 짓게 된 것이다.
다른 또 재미난 에피소드는, 그녀가 미국 미술품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수백여점의 예술품을 수집하였고, 이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기증을 하고자 하였으나, 박물관에서 거절을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어이없는 결정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미국 예술품이 많이 각광을 받는 때는 아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당시에 뉴욕 모마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유럽의 현대예술작품을 조명하는 미술관이었기 때문에, 이를 보고 자극을 받은 Gertrude Vanderbilt Whitney 가 미국 예술작품을 위주로 하는 미술관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휘트니 뮤지움이 설립된 것은 1931년 이지만, 1918년에 이미 Gertrude Vanderbilt Whitney가 미술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갤러리를 만들었으니, 휘트니 뮤지움은 지난 100여년간 미국의 예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60년대에 휘트니 뮤지움은 더 큰 장소가 필요로 하여 우리가 최근까지도 휘트니 뮤지움으로 알고 있었던 매디슨 에비뉴에 새로운 뮤지움을 계획한다. 이는 유럽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에 모더니즘이라는 혁명을 일으킨 학교로 유명한 바우하우스의 마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 가 설계하게 된다. 이 건물은 50여년간 휘트니 뮤지움의 명성을 지켜준 건물인데, 지금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다. 물론 메트로폴리탄의 센트럴 파크 박물관은 여전하지만,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100여년 전에 MET에서 퇴짜를 놓았던 미술 콜렉터가 미술관을 세워 대단한 성공을 이루고, 이후에 뉴욕 첼시로 새로운 터전을 세워 나가게 됨으로서, 그 공간을 다시 MET에서 임대를 하게되는 스토리가.
렌조 피아노
아무쪼록 오늘 다루고자 하는 박물관은 지난 50년간 휘트니 뮤지움의 명성을 세워준 기존의 박물관이 아니라, 앞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첼시의 새로운 박물관이다. 올해 오픈한 이 새로운 뮤지움은 사실 엄격히 말하면 Meatpacking District 에 있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뉴욕의 첼시 지역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 하다. 이 첼시라는 지역은 원래 뉴욕에서 제일 비싼 동네는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본 연재의 첫 회때에도 언급하였던) 뉴욕 하이라인 프로젝트가 성사되면서 지금은 뉴욕에서 가장 ‘핫한’ 동네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때문에 원래 자리잡고 있던 갤러리나 공방같은 시설들이 많이 쫒겨나고 있고, 자본이 충분한 상업시설이나 휘트니 뮤지움 같은 시설들이 이 지역을 바꾸고 있는 상황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말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 중에 있는 동네이다.
이곳에 새로운 뮤지움을 오픈하면서 휘트니 뮤지움은 새로운 첼시시대를 열었는데, 이 설계는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맡았다. 사실 이 부분에서 미국인들의 오픈 마인드를 살짝 엿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 한국예술을 위한 뮤지움을 설계할 때 일본 사람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이러한 쓸 데 없는 생각을 차치하면, 사실 렌조 피아노는 두말 할 나위 없는 세계적인 건축가이다.
렌조 피아노는 1970년대에 파리 중심에 퐁피두 센터를 리차드 로저스와 함께 공동 설계함으로서 세상에 자신의 이름 석자 (석자는 아니지만)를 새긴다. 이 건물은 당시로서는 완전히 파격적인 건물이었다. 건축에서 늘 미학적으로 아름답지 못하다는 판단에 감추고자 하는 복잡한 설비들을 건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건축의 민낯, 요즘말로 건축의 쌩얼에서 그 미학적인 부분을 충족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말처럼 쉬운 결정은 아니었는데, 인간의 내장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 만큼의 어려운 과정이 필요로 한 것이었고, 이에 도전한 건축가뿐만 아니라 이를 선택한 파리시의 결정 역시 대단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 때부터 렌조 피아노는 건축의 공간뿐만 아니라, 작은 요소 하나하나까지도 건축의 공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하고 이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 작업이 현재 휘트니 뮤지움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사실 뉴욕은 여러가지 규제와 입김들이 맞물려있어서 좋은 건축작품을 만들어 내기가 쉬운 곳은 아니다. 이러한 면에서 휘트니 뮤지움 역시 렌조 피아노의 대표작으로 불리우기에는 조금은 아쉽다. 하지만, 역시나 뉴욕이라는 컨텍스트와 세계적인 미술관이라는 컨텐츠가 수 많은 방문객으로 하여금 이 뮤지움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이 뮤지움의 가장 큰 특징은 미술관 동선이 안과 밖을 오다닌다는 점이다. 물론 내부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도 있지만, 아주 추운 겨울이나 혹한 날씨가 아니라면 외부 테라스를 통해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갤러리 안에 있는 작품만이 예술작품이 아니라, 외부의 테라스에서 보이는 뉴욕의 풍경 역시 미국이 만들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는 테라스의 위치를 보면 건축가의 의도를 쉽게 눈치 챌 수 있는데, 우리 상식으로는 외부 테라스를 강변쪽에 놓아서 좋은 풍광을 경허할 수 있도록 했겠지만, 렌조 피아노는, 그것보다는 뉴욕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Top of the Hub같은 높은 전망대에서 보는 뉴욕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전망대에서는 뉴욕의 화려한 모습만이 보이지만, 휘트니 뮤지움의 테라스에서는 뉴욕의 민낯을 볼 수 있다. 화려함과 더러움이 공존하고, 깔끔함과 번잡합이 공존하고, 새로움과 오래됨이 공존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흔히들 건축을 생각할 때, 건축의 화려함이나 내부의 공간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진짜 훌륭한 건축은 그것이 놓여있는 도시의 맥락과 함께 할 때 가치가 발하는 것이다. 아무리 휘트니 뮤지움이 훌륭한 건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서울 한복판에 가져온다고 해서 훌륭한 건축이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맥락에서 건축이 도시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낼 때만이 훌륭한 건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더라도, 뉴욕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휘트니 뮤지움은 꼭 그 안의 작품때문만이 아니라 건축과 도시와의 케미스트리를 보러 가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