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NICE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No. 188

NICE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No. 188

영화 속의 도시, 그리고 도시 속의 건축 <골든 슬럼버>

임동우

오늘 소개할 영화는 일본 영화 <골든 슬럼버>다. 이 영화는 나카무라 요시히로의 2009년 작인데, 우리에게는 아마도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익숙한 주연배우 사카이 마사토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주인공 다케우치 유코가 출연한 영화로 더 익숙할 것이다. 이 영화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작가인 이사카 코타로는 처음부터 이 소설을 헐리우드 스케일을 목표로 썼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어보지는 못해서 영화와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흥미로운 구성의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일본 영화의 특성상 이 소설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빠른 호흡과 큰 스케일의 영화로 만드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던 듯 하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기본 구성에 따라 ‘스릴러’물로 홍보되었다. 하지만 많은 일본 영화가 ‘드라마’에 치중해서 그런지, 이 영화 마저도 스릴러적인 요소보다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조된 영화가 되었고,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이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알고 있겠지만, ‘Golden Slumbers’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비틀즈 네 멤버의 앨범 자켓 사진으로 유명한 ‘Abbey Road’에 실린 폴 맥카트니의 곡이다. 비틀즈의 불화위기가 있고 1970년 해체하기 직전인 1969년에 발표된 이 곡은, 영화에서도 설명이 되지만, 옛 시절에 대한 향수가 짙게 뭍어있는 곡이다. (실제로는 존 레논을 제외한 세 명만이 이 곡 녹음에 참여했다) 주인공인 아오야기 (다케우치 분) 역시 대학시절 함께하던 4인방이 있었다. 영화는 누명을 쓰게되는 아오야기의 현재 상황을 전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의 세 친구를 적절히 등장시켜 과거에 대한 향수를 보여준다. 대학시절 패스트푸드 음식점 등을 돌아다니며 맛평가를 하는 동호회를 결성해서 뭉쳐 다니던 이 4인방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행복한 나날만을 보냈다. 비록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는 허접한 동호회지만 그들만큼은 늘 즐거웠다. 그리고 서로가 공유하는 그 때의 추억 때문에, 졸업 후 한동안 연락없이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어려울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비틀즈와 영화 속의 4인방의 연계성을 높이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처음 등장하는 아오야기의 친구 모리타는 (마치 비틀즈에서의 존 레논의 부재를 연상시키듯)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아오야기가 일본의 총리대신을 살해한 용의자라는 누명을 쓴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모리타는 아오야기에게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 아오야기가 누명을 쓰게 될 것이라고 얘기를 전달하며, 마치 존 F 케네디 처럼 일본 총리대신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이야기 해준다. 재미있는 것은, 케네디를 살해한 용의자로 알려진 오즈왈드나 존 레논을 살해한 마크 채프먼 모두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책을 읽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연계성을 영화에 가져오며, 총리대신을 실제 살해하는 집단이나 모리타를 살해하는 집단이 연계되어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영화적으로 재미있는 장치임에는 틀림없다.

일본의 중소도시 센다이

아오야기는 영화 초반 총리대신이 살해당하는 시점서부터 계속해서 도망치며 센다이 곳곳을 누비며 다닌다. 이 영화의 배경이 왜 센다이가 되었어야 하는지는 정확한 설명은 없다. 사실 총리대신의 퍼레이드 때문이었다고 하면, 도쿄나 오사카와 같은 더 큰 도시를 배경삼았어도 되었을텐데, 동북부 도호쿠 지방에 위치한 센다이를 배경으로 한 이유를 명쾌하기 찾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도호쿠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이 지방에서 유일하게 한국 영사관이 있는 도시라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센다이가 중요하지 않은 도시는 아니다. 하지만, 인구 백만 정도의 센다이는 우리나라의 수원이나 울산정도의 인구 규모로서, 중요도에 비해서는 그닥 큰 도시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중소도시와 일본의 중소도시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시 환경의 질이다. 일본은 예로부터 지방정권들이 발달해서 지방의 도시들이 오랜 역사를 갖고 발달해왔다. 때문에 여러 도시 인프라나 문화, 역사가 오랜 시간 축적되어있는 지방의 도시들이 많이 있는 편이다. 반면, 한국은 중앙집중식 정치체계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때부터 오로지 서울에만 모든 것이 편중되었다. 물론 근현대에 들어와 지방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기는 했지만, 몇 백년의 역사가 축적되어있는 도시들과는 조금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는 독일과 프랑스의 도시들을 비교해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지방자치가 강했던 독일은 여전히 여러 도시들이 고루고루 발달해있는 반면, 중앙집중형 왕권이 강했던 프랑스는 역시 파리를 제외하고는 다들 고만고만한 지방 도시들인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경우에 예외는 존재하긴 하지만)

센다이 역시 17세기 (1600년)에 센다이성이 세워진 이후 꾸준히 도호쿠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성장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다이가 도쿄에서 차로 네 시간 이상 걸리면서도, 간사이 지방의 교토나 고베처럼 관광할 거리가 많다거나, 또 홋카이도의 삿포로 처럼 유명한 온천이 있다거나 하는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비록 실제 온천은 많기는 하지만) 우리가 일본 방문때 흔히 찾는 도시는 아닐 것이다. 물론 여러 마츠리 (축제)나 음악페스티벌이 많이 열린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한국사람들에게 방문 1순위는 아닌 듯 하다.

아마도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이유에서 익숙할텐데, 하나는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가 있는 다이린지 절이 있는 도시여서 일테다. 사실 안중근 의사는 센다이와 직접적인 연관은 전혀 없지만, 그를 관찰하던 일본인 간수가 고향인 센다이로 돌아올 때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함께 모셔와 이곳 다이린지에 의사의 위패가 모셔졌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이유는, 몇 해전 있었던 3.11 대지진 때문에 센다이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듯 하다. 사실 우리에게는 방사능 유출이 더 민감한 사항이라 후쿠시마 원전 지역을 더 익숙하게 접했겠지만, 센다이는 당시 진원에서 180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시로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에 하나이다. (아마 이 때문에 한국 관광객의 수는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다)

필자가 센다이를 방문한 것은 2006년 봄이었는데, 당시의 기억으로는 조용하고 차분한 도시였다. 당시에 도쿄에서 매일 11시까지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유일한 낙은 금요일 밤에 밤기차 혹은 밤버스를 타고 일본의 지방도시에 놀러가는 것이었다. 때문에, 도쿄의 번잡한 환경에서 (게다가 사무소가 시부야 근처였다) 밤버스를 타고 새벽에 센다이에 내렸는데, 얼마나 차분한 느낌이 들었는지 (물론 새벽이어서 더 극명한 차이가 있었겠지만) 그 느낌은 아직도 어렴풋이나마 기억이난다. 당시에는 미국생활을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몰랐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현재 필자가 살고있는 보스톤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도시였다. 사람들은 여유가 있었고, 대도시만큼 번잡함은 없지만, 그렇다고 ‘후진’ 느낌이 드는 도시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방문한 (그리고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센다이 미디어테크에서 본 센다이 사람들은 필자가 흔히 한국의 공공 도서관에서 보는 고시생이나 취업준비생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센다이 미디어테크

센다이 미디어테크(Mediatheque)는 센다이의 공공 도서관이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도서관은 새 천년(2000년)을 맞이하며 기존에 흔히 볼 수 있는 도서관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도서관, 즉 새 천년에는 도서관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도서관이 되기를 원했다. 도서관의 원래 그리스어 명칭인 Bibliotheca 혹은 Bibliotheque에서 따와, 더 이상 책 많이 아니라 여러 미디어가 정보의 원천이라는 의미에서 Mediatheque를 사용했다. 어찌보면 유치한 작명일 수는 있으나, 이러한 의도 안에서 건축가인 이토 도요는 단지 새로운 도서관이 아니라 새천년에 새로운 건축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그에 대한 답으로 센다이 미디어테크를 설계하였다.

센다이 미디어테크를 방문해본 사람이면 대부분 느끼겠지만, 들어서자마자부터 느끼는 시원시원한 공간이다. 방문하자마자 경비아저씨를 지나 작은 로비에서 몇층 열람실을 갈까 고민해야 하는 많은 공공 도서관과는 다르게, 센다이 미디어테크는 1층에서부터 열린 공간이 펼쳐지고 열린 전시가 일어나고 있다. 본 연재에서 작년에 소개한 렘콜하스의 시애틀 공공 도서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 도서관의 추세는 지역의 또 하나의 공공공간 (public space)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기존의 도서관이라고 하는 것이 책을 보관하면서 열람 및 대여해주는 기능이 컸다고 한다면, 이제는 도서관에 와서 휴식을 취하고 문화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정보가 책보다는 디지털 미디어에 저장되어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도서관 = 책”이라는 논리로는 대중을 도서관으로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센다이 미디어테크는 무거운 벽돌이나 돌 대신 유리를 전면에 사용함으로서 좀 더 투명한 도서관이 되고자 하였다. 예전의 도서관들처럼 무겁고 권위있는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방문객들에게 더 쉽게 열려있고, 바로 앞의 공원의 나무들을 유리 입면에 투영시킴으로서 좀 더 친숙한 도서관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 도서관이 열린 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건 사실 내부공간에서 더 쉽게 느낄 수 있다. 비슷한 규모의 많은 건물들이 기능적인 요소들, 즉, 엘리베이터, 계단실, 덕트 등을 감추기 위하여 무거운 벽체를 만들어 그 안에 이러한 기능적인 부분들을 숨기곤 한다. 다시 말하면, 건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미적으로 훌륭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은 감추는 것이다. 하지만 센다이 미디어테크에서는 이를 감추는 대신, 대나무 꽈리를 연상시키는 구조체로 이들을 감쌈으로서 무거운 벽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게 하였다.

이 대나무 꽈리같은 모양의 구조체는 일반적인 기둥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들을 통해 상부의 빛이 자연스럽게 아랫층으로 전달된다. 이 구조체의 기능적인 역할을 모르고 보면 그냥 단순히 기이한 형태의 기둥이라고 생각될지 모르나, 건축적으로는 일반적인 기둥 대신 새로운 형태의 구조체를 썼다는 것 만으로도 매우 혁신적인 도전이었다. 실제로 건축가 이토 도요는 이 구조체를 완성하기 위하여 잠수함 설계사에게 조언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단순히 건축적인 접근으로는 기존의 것을 답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건축의 새로운 수장, 이토 도요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토 도요는 새천년 즈음에 이 프로젝트 설계를 의뢰받고 새천년의 건축은 어떠해야 할까에 대해서 선언적인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건축 역사에서 보면 2000년은 1900년대 초기 발생한 근대주의가 100여년이 되는 시점이었기에, 많은 건축가들이 근대주의 이후의 건축은 무엇이 될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이토 도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센다이 미디어테크에서 새로운 구조체와 새로운 건축언어를 사용하며 근대주의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이와 더불어 자연을 어떻게 하면 건축에 함축시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한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이토 도요 건축, 혹은 일본 건축의 힘이었다.

그가 1980년대에 설계한 ‘바람의 탑’은 자연와 기술의 만남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당시만 해도 서양에서는 자연을 건축의 요소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이 많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에 더욱 신선했다. 서양인들의 눈에는 아마도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을 존중하는 동양의 철학과 일본의 기술이 접목될 수 있어서였다고 판단했던 듯 하다. 이 프로젝트는 건축가 이토 도요를 세계적인 무대로 나갈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준 프로젝트로, 세계 무대에서는 그를 (지난호에 소개한) 마키 후미히코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일본의 대표 건축가로 성장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물론 당시 이토 도요는 45세의 비교적 젊은 (건축가 치고) 나이었기 때문에 아직 일본 건축계의 수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30여년이 흐른 지금 그는 뉴욕 모마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원래는 모마에서 그의 개인전을 제안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 동료 건축가들의 작품과 함께 보아야 한다며 5명의 건축가를 더 추천한다. 그들 중에는 이 연재에서 소개한 SANAA의 카즈요 세지마나 소우 후지모토처럼 그의 사무실 출신들도 포함이 되어있다. 명실공히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되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명성과는 다르게 이토 도요는 굉장히 겸손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프리츠커 상을 받게해준 센다이 미디어테크 이후 그는 프로젝트의 홍수 속에 있었고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2011년 3.11 대지진 이후, 그는 전세계의 그 어떤 대규모 프로젝트보다도 지진 피해지역을 복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이것이 단순한 일회성 노력이 아니라, 몇 년에 걸쳐서 일본 건축가들을 모집하고, 피해지역 주민들과의 만남 등을 통해서 자생할 수 있는 마을을 다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그 대답을 찾아나아가고 있다. 그 스스로 이야기 하였듯, 그의 건축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 중에 하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모습 때문에 여러 건축가들이 그를 존경하는 건축가로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가 센다이 미디어테크 같은 훌륭한 작품을 남겨서뿐만 아니라,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 스스로 고민하고 행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마치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고 그것에 주목하는 것이 하나의 건축가 마케팅 기술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전혀 마케팅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없는 상황의 이토 도요의 이러한 행보가 많은 귀감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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