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NICE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No. 187

NICE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No. 187

영화 속의 도시, 도시 속의 건축 <세인트 루이스>

임동우

Up in the Air

오늘 다룰 영화는 죠지 클루니가 나와 더욱 유명한 <업 인 디 에어, Up in the Air>이다. (종종 그렇듯 이 영화의 한국에서의 제목은 “인 디 에어”로 오역을 해 놓았다.) 우연치 않게 지난회에 이어서 연달아 죠지 클루니가 출연하는 영화를 소개하게 된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사실 그렇게 배경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비행기를 타고 1년에 300일 이상 출장을 다니는 주인공의 모습을 다뤘기에, 영화 내에서도 그다지 배경에 무게를 싣고 있지는 않다. 헌데 필자가 지난 봄학기 15주 동안 매주 2박3일 출장을 다닌 미국 중서부의 세인트 루이스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알아보다 보니, 우연치 않게도 이 <인 디 에어>가 세인트 루이스에서 대부분의 씬이 촬영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영화 속 주인공인 죠지 클루니의 마음이 십분 공감이 되는 듯 하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미드” <오피스>로 더 친숙한 제이슨 라이트만 (Jason Reitman)감독의 2009년 작이다. 사실 이 영화는 흥행에도 꽤 성공하고 2010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 상등 6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화제를 일으켰지만 결국 하나도 수상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어찌보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그 해에 어떤 영화가 아카데미를 휩쓸었는지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바로 수긍을 할 것이다. 바로 <아바타, Avatar>와 함께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나름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던 이유는 이 영화가 주는 잔잔한 이야기들 때문일 것이다.

라이언 빙햄(죠지 클루니 분)은 해고 전문가이다. 언뜻 들으면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그야 말로 해고를 하러 다니는 사람이다. 모든게 컨설팅과 아웃소싱되는 문화인 미국에서 한 업체가 직원을 해고하는데 있어서 다른 전문업체를 불러 해고한다는 것이 사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언뜻보면 다양한 곳으로 출장을 다니고 좋아보일 법한 직업이지만 라이언의 유일한 낙은 비행기 마일리지를 적립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은 일 하러 다니는 출장도 아니고, 늘 사람에게 해고 통보를 하러 다니는 일이니, 일을 통한 즐거움을 만끽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가능해 보인다. 직업적 특징이 라이언의 성격을 만든 것인지, 아니면 라이언의 본래 성격때문에 그러한 직업을 택하고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영화 속 라이언은 매우 철두 철미한 성격이면서 동시에 어딘가 정착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고 그 필요성에 대해서도 못느낀다. 영화의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에는 싱글이었던) 죠지 클루니가 시나리오를 처음 보고 라이언과 본인의 공통분모를 많이 발견했다고 한다. 그 역시 어딘가에 정착하는 것을 거부 (혹은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라이언은 이곳 저곳을 떠돌며 자신에게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하지만 해고 당사자에게는 너무나도 격할 수 밖에 없는) 출장을 지속하는 가운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알렉스 (베라 파미가 분)를 만나게 된다. 알렉스 역시 잦은 출장 가운데 진지한 관계를 갖기 보다는 가벼운 이성과의 만남을 선호하며 정착하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알렉스와 라이언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서로의 “쿨한” 관계를 이어가려 한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단순한 로맨스 영화처럼 보여질 수도 있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관계맺는 것들에 있어서 직접적인 ‘터치’가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일예로, 영화에서 라이언의 회사 후배 나탈리(안나 케드릭 분)는 인터넷 화상채팅을 통한 해고시스템을 제안한다. 그녀는 해고는 단순한 통보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러한 생각으로 해고 통보를 하였고, 그 통보를 받은 이가 자살 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나탈리는 업계를 떠난다. 결국 영화에서는 아무리 라이언이 고리타분한 사람일지라도 해고 통보를 함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으로서 ‘터치’가 있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해준다. 오히려 그런 것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캐릭터를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여동생 결혼식에서 신랑에게도 직업적 습관으로 조언을 해주었는데 (자신은 결혼을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무사히(?) 결혼이 진행된다. 라이언도 알고보니 (본인은 인정하기 싫지만)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형식상 하는 조언이라고 생각되지만, 점차 그를 알아갈 수록, 그는 그 시니컬한 태도 안에 따뜻함을 갖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알렉스를 만나면서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정착”이 필요함을 시인하게 된다.

정착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도시, 세인트 루이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정착과는 거리가 있어보이는 미 중서부 미주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많은 씬이 촬영되었다. 앞서 설명한 바처럼, 물론 이 영화의 배경이 어디인지가 아주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행여나, 감독이 특별한 이유에서 세인트 루이스를 주 배경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하여도, 아마 이 아이러니를 나타내기 위해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착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는 것은 지극히 외지인으로서의 필자가 느끼는 바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근 카디널스에 입단한 오승환이 괜시리 걱정되기도 한다)

세인트 루이스는 앞서 소개한 신시내티처럼 운하와 철로를 통한 물류가 발달했단 19세기, 20세기 초반까지 활발하게 성장하던 도시이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사회는 마치 지난 세기의 모습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아직도 도시의 다운타운은 밤 시간이 되면 슬럼화가 되기도 하고, 흑인들이 몰려사는 곳과, 돈 많은 백인들이 사는 외곽지역과는 철저히 분리가 되어있으며, 흑백인 이외의 다른 인종들은 찾아보기도 힘들다. 심지어는 미국 어디에가도 보이는 중국인들과 라티노들 마저도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의 큰 도시들에서는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 라티노다. 그런데 이곳은 대부분 흑인이다. 그만큼 아직도 인종의 다양성이 굉장히 편협한 도시이고, 때문에 외지 사람들이 세인트 루이스에 정착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물론 큰 학교 병원이 있고 하기 때문에 직업상 새로 정착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지역출신이 많다고 한다. 시애틀처럼 단순히 새로운 환경을 찾아 다양한 인종들이 섞이는 도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도 메트로 (트램)를 타면 우리가 생각하는 중산층이라기 보다는 저소득계층이 많고, 때문에 차가 있는 중산층은 더더욱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꺼려한다.

필자가 세인트 루이스의 워싱톤 대학에 출강하며 메트로를 타고 공항과 학교, 그리고 호텔을 오다닌다고 하니, 주변 교수들의 눈이 휘동그래지는 것을 많이 목격하였다. 겉으로는 메트로 기다리는 시간이 싫다고는 하지만, 결국에는 메트로에는 함께있기 꺼려지는 사람들과 함께 타기 때문에 메트로보다는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만큼 아직도 세인트 루이스라고 하는 도시의 사회가 폐쇄적이고 정체되어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는 약간 다르지만 적어도 미국에서 만큼은 사회가 폐쇄적인지 아닌지 보기 위해서는 도시의 다운타운이 얼마나 개발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의 많은 도시들이 2차대전 전후해서 팽창하였고, 그러면서 흔히 얘기하는 서브어반, 즉 교외가 발달하였는데, 이 때 중산층 이상의 가정들은 모두 마당이 있는 교외로 떠났다. 때문에 대중교통에 의존해야 하는 저소득층은 도심에 남아있게 되었는데, 그럼에 따라 직장인들이 떠나는 저녁시간이나 주말에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도심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으로 도심은 점차 악화되고 슬럼화 되며 범죄율이 올라갔으며, 교외에 사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이를 방치하고 될 수 있으면 대중교통 수단이 자신들의 지역까지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후 문제가 지속되면서 1960년대부터 많은 도시들에서 도심재생운동 (Urban Renewal Movement)을 하며 도심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물론 이 과정 중에 도시의 많은 역사가 재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도심에 좋은 공원, 좋은 주거, 좋은 일자리들을 창출하며 교외로 나갔던 중산층들을 다시 끌어모으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하여 새로운 소비 시설들과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물론 피츠버그나 보스톤, 뉴욕처럼 이것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지금까지 새로운 도시 문화와 환경이 현재 진행형으로 생겨나고 있는 도시들도 있지만, 세인트 루이스처럼 성공적이지 못한 도시들도 생기게 된 것이다. 성공적인 도시들에서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섞여 사는 환경이 갖추어지게 되었고, 성공적이지 못한 도시들에서는 아직도 특정한 인종,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도심이 된 것이다. 때문에 아마도 방문 때 마다 늘 다운타운 호텔에 묵었던 필자가 왠만한 세인트 루이스의 교외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다운타운에 대해서 잘 알 수도 있다.

To the West; The Gateway Arch

미국의 많은 도시들이 1960년대 근방에 도심을 재생하기 위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하였는데, 보스톤의 경우는 새로운 시청사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루덴셜 타워 일대가 새로 정비되었고, 뉴욕은 타임스퀘어 일대가 새로 정비되었다. 세인트 루이스는 이 일환으로 일리노이주와 미주리주를 구분짓는 미시시피 강변에 게이트웨이 아치를 건설한다. 세인트 루이스는 “서쪽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자신들이 동부에서 서부로 향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사실 건축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이 게이트웨이 아치는 구조적으로도 매우 훌륭하지만 미적으로도 매우 직감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단 하나의 선으로 구조미를 표현한 것이다. 이 아치를 설계한 건축가는 필란드계 미국인 건축가 에로 사리넨 (Eero Saarinen)이다. 아마도 건축을 하지 않는 일반인에게는 그가 디자인 한 가구들이 더 친숙할 것이다. 이제는 카피라이트가 풀려 아무나 베껴서 생산할 수 있게 되어 우리에게 더욱 친숙해진 의자들 중에는 그의 디자인이 꽤 있다. 아무튼, 건축으로서는 워싱턴 덜레스 공항이 일반 독자에게는 제일 친숙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일 것이다. (또 제일 유명하기도 하다) 그 공항에 다녀와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리넨은 구조가 지니는 미적인 감각을 최대한 끄집어 내어 건축의 미학을 표현한다.

아무튼 다시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가자면, 아무리 훌륭한 건축가를 통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고는 하지만, 이미 세인트 루이스는 방향을 잘못잡은 듯 하다. 서부개척시대도 아니고 1960년대에 To the West라니. 때문에, 많은 돈을 들여 도심재생을 하고자 했던 세인트 루이스의 계획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아직까지도 도심의 많은 땅들은 이후에 주차장시설로 채워졌고,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장소로 남겨지게 되었다. 물론 최근에 들어 야구장도 새로 짓고 수변 공간도 새단장을 하는 등 다시금 도심을 재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나마 세인트 루이스에는 아직도 올드머니가 많이 남아있어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 기부를 하는 많은 부호들이 있고, 이들을 활용하여 센트럴 웨스트 같은 지역에 많은 갤러리들과 예술가를 위한 작업실등을 마련,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Sam Fox School of Design & Visual Arts

이러한 부호들 중에 Samuel Fox가 있다. 그는 1970년대에 세인트 루이스에 창업한 Harbour Group Industries를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고 (연간 매출이 1조원이 넘는 주식회사가 아닌 사기업이다), 그는 이 부를 다시금 도시에 기부하였다. 그래서 세인트 루이스는 도시 곳곳에서 Sam Fox혹은 Fox Family Foundation의 이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의 디자인 대학이다. 사람들이 워싱톤 대학하면, 시애틀이 있는 워싱톤주의 주립대학을 생각하거나 워싱톤 DC에 있는 대학인가 생각하기 쉬울텐데, 세인트 루이스의 워싱톤 대학은 주립대 규모의 사립대이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Sam Fox를 비롯하여 많은 지역 유지(?)들이 대학에 어마무시한 지원금들을 내고, 미국에서 몇 번째로 큰 대학 병원 및 연구시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대학의 규모는 엄청나다. 학교 기금이 7조원대이며 학생 및 교직원 수만 3만명에 육박하는 학교이다. 때문에 필자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이 학교는 주립대의 문화와 사립대의 시설이 함께 어울어져 있는 듯이 보였다. Sam Fox로 부터 후원을 받은 Sam Fox School of Design & Visual Arts 는 종합대학으로서의 세인트 루이스의 워싱톤 대학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단과대학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디자인/예술 대학에 일본인 건축대가 후미히코 마키 (Fumihiko Maki)의 건물이 세 개나 있다. 그 중 2개, 즉 Walker Hall과 Kemper Art Museum 은 최근 (2006년)에 함께 지은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에 지은 Steinberg Hall이다.

일본 건축의 수장; 후미히코 마키

1928년 생인 후미히코 마키는 그야말로 일본 건축계의 살아있는 수장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일본 건축의 아버지라고 하면 1964년 도쿄올림픽 경기장과 도쿄 신청사를 설계한 겐조 당케(1913-2005)라고 하고 그 이후 후미히코 마키가 2세대쯤 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두 명의 건축가들은 모두 프리츠커 수상자들이다. 마키는 흔히 말하는 첫 유학세대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는 동경대를 졸업하고 1950년대 미국으로 유학와 크랜브루크 예술학교와 하바드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였다. 언젠가 그가 강연하는 것을 들었는데, 당시에는 비행기도 없었고, 배로 샌프란시스코까지 와서 그다음에 기차와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였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유할길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석사 졸업 후 세인트 루이스의 워싱톤 대학의 교수로 잠시 재직하였는데, 당시에 그의 생에 첫 커미션을 받았는데 그것이 Steinberg Hall이다. 이제 서른살 갓 넘은 나이의 젊은 건축가에게는 아무리 운이 좋아도 주변 친인척의 주택이 첫 작품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마키는 어떤 능력을 타고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을 설계할 기회를 가졌으니 대단한 행운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홀은 전통적인 양식의 돌 건물들 사이에 계획이 되었는데, 젊은 건축가로서 마키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전반적인 건물의 높이 등은 주변의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는 대신, 재료나 디자인에 있어서 과감히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때문에 많은 대조적인 의견이 있었지만, 적어도 건축적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생각을 실현시켰고, 이 작품으로 인해 (비록 완공 직후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마키는 시작부터 건축계에 큰 족적을 남기며 그의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한다.

근 50년이 지나 마키는 자신의 처녀작 맞은편에 새로운 뮤지움과 감의동 설계를 의뢰 받는다. 시작부터 대단한 행운을 타고난 마키에게 또 다른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50년 전의 마키와 지금의 마키는 다르다. 50년 전의 마키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데뷔도 하지 못한 신인 건축가였고, 지금은 그가 죽기 전에 그의 스케치라도 하나 받아놓기 위해 줄을 서야 하는 입장의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건축가가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새로 지은 두 개의 건물, 즉 Walker Hall과 Kemper Art Museum은 그의 처녀작만큼의 충격은 없었다 생각한다. 조금 더 정제되고 조금 더 젊잖아졌다고 해야할까. 건축적인 완성도에 있어서야 당연히 Steinberg Hall보다 훨씬 훌륭하지만, 그의 처녀작이 가졌던 당돌함. 거칠음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 실제로도 이것이 마키 건물인지 모르고 방문하면, 그냥 지역에서 열심히 잘 하는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라고 착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제는 마키가 직접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설계하는 과정이 적어서 이러한 결과를 낳았으리라.

필자는 10년 전에 도쿄에 있는 마키 사무실에서 일 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도 이미 80에 가까운 나이었지만 서른 남짓한 젊은 건축가에게 정정하게 농담을 하며 친근하게 대해준 마키상이 기억난다. 그의 사무소는 Hillside Terrace라고 하여 시부야와 다이켄야마 사이의 부촌에 형성된 근린생활 및 주거시설에 위치한다. 이 역시 그가 설계한 프로젝트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50여명 남짓한 직원이 대부분 일본인이었는데 (두어명의 서양인도 있었다) 대부분 영어를 꽤나 잘 쓴다는 점이었다. 알고보니 회사의 90%의 프로젝트가 해외프로젝트라고 한다. 앞서도 도요 이토, 카즈요 세지마, 류 니시자와 등 일본의 건축가 등을 소개하였지만, 늘 이들의 국제적인 명성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이들의 개인적인 능력이 걸출나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것일 수도 있지만, 건축은 결국에 국가와 문화 경쟁력이 얼마나 있는가에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일본은 그 힘을 바탕으로 건축계 내에서도 끈끈한 동료의식을 발휘한다. 얼마전 뉴욕의 모마에서 도요 이토를 초대하여 개인전을 열고자 하였을 때, 도요 이토는 자신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변 건축가들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며 가즈요 세지마, 소우 후지모토, 준야 이시가미 등을 함께 초청해주기를 요청했고 모마는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힐사이드 테라스 30주년 기념 전시회때에도 후미히코 마키상을 축하해주기 위하여 평소에는 얼굴도 보기 힘든 소위 말하는 일본의 스타 건축가들이 함께 참석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서로의 능력과 명성을 서로 인정해주고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서 가능한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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