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도시, 그리고 도시 속의 건축
임동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두번째 거점 항저우
일본 가나자와에 이어 또 다른 영화 속 아시아 도시로 이번에는 항저우를 다루고자 한다. 항저우는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한편 중국 도시를 관광함에 있어서 우선 수위에서 베이징, 상해, 소주 등 다른 도시들에 밀리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상해나 베이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야 중국 영화 뿐만 아니라 외국의 영화들도 꽤 되는 편이나, 항저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찾기 힘들다. 필자가 “영화속의 도시, 도시속의 건축”을 연재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항저우에서 한달 이상 체류할 계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이 도시를 선택하지 못했던 이유는 순전히 이 도시 배경의 영화가 마땅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 올 여름 첨만관객 영화 <암살>이 개봉하면서 항저우를 다룰 수 있는 조그마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암살>이 항저우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아니지만, 잠깐 등장하는 항저우의 모습에서 항저우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방문도 해보았겠지만, 아마 항저우 임시정부는 이번 <암살>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며 상하이에서 설립되었다. 하지만 이후 임정의 거처는 계속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중심배경은 1930년대인데, 이 때에는 이미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따라서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은 1932년에 항저우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임정은 1937년 난징, 1938년 광저우 등 마땅한 거점이 없이 계속해서 거처를 옮기다 1940년대에 중국 내륙인 충칭까지 피신(?)해 간다. 영화에서 왜 상하이 아닌 항저우 시기의 임정을 배경으로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항저우 이후의 임정의 여정을 보면 항저우가 그래도 항일운동의 거점지 역할을 했던 거의 마지막 도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왜냐하면 항저우 이후에는 각 도시에 1년도 채 안되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너무 큰 흥행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봤을 영화이기에 영화에 대한 설명을 맣이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지만, 그래도 간단히 설명하자면, <암살>은 우리 나라에서 상업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감독 중의 하나인 최동훈 감독의 2015년 작품이다. 한국판 <오션스 11>으로 주목을 받았던 <범죄의 재구성>으로 데뷔한 최동훈 감독은 이후 <타짜>, <전우치> 등 연이은 히트작을 남겼고, 역시 뭐니뭐니 해도 바로 전작인 <도둑들>에서 그의 상업성은 다시 한 번 확인이 된다. 데뷔작부터 5개의 영화를 연달아 히티시킨 감독이 한국에 몇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흥행 성적만큼이나 그의 영화들이 갖는 특색이 있다. 바로 배우들의 “떼 출연”이다. <도둑들>에서 이 “떼 출연”이 정점을 찍기는 했지만, 그의 영화를 보면 정말 수준급 배우들이 많이 출연을 한다. 그나마 <전우치>에서 조금 강동원에게 무게가 쏠리기는 하지만, 최동훈 감독은 배우들의 “떼 출연”을 잘 이용하고 또 요리하는 감독인 듯하다. <암살> 바로 전작인 <도둑들>에서 7~8명의 주연급을 등장시키면서도 영화의 긴장감을 안떨어뜨리고 빠른 호흡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을 보면 “떼 출연” 요리를 잘하는 감독인 것은 확실하다. 특히 전지현에게(전지현이 한동안 선전해왔던 핸드폰) “애니콜”이라는 별명을 붙여 등장시킴으로서 캐릭터 설명하는 시간이 거의 없이도 사람들이 전지현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던지, 김혜수 역시 그녀가 평소 갖고 있는 이미지를 바로 차용해 효율적으로 캐릭터 설명을 끝내버린다. 이는 <암살>에서도 비슷한데, 1인 2역을 하고 있는 <암살>속의 전지현은 영화 <베를린>속의 전지현과 <도둑들> 속의 전지현 둘이 등장하는 느낌이다.
물의 도시:항저우
다시 영화의 배경 중 하나로 등장하는 항저우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면, 영화 속에서 항저우는 물의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마치 베니스에 와있는 것처럼 배들이 도시내 수로를 따라 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언뜻 보면 놀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베니스와는 다르게 현재의 항저우에서 그러한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항저우는 중국 수나라 시절(581~618 AD) 완성한 베이징에서 시작하는 중국 내 물길의 다른 쪽 끝 도시이며, 현재도 항저우의 북쪽으로는 많은 물길들이 남아있다. 우리가 흔히 중국의 물의 도시 하면 쑤저우를 많이 생각하게 되고 항저우하면 서호(西湖)를 많이 떠올리게 되는데, 아마도 이는 항저우의 많은 물길들이 예전 서울의 청계천이 그러했던 것처럼 복개 공사를 통해 더 이상 지상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 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저우는 여전히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매력적인 도시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이는 단지 뉴욕의 센트럴 파크 만큼이나 항저우의 중심이 되고 있는 서호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에는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 즉 하늘에는 턴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항저우라는 도시가 그야말로 꼭 가보아야 할 곳 중 하나이고, 그 떄문인지 항저우에 가면(비단 항저우뿐만이 아니겠지만) 중국 내국인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보인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상대적으로 상하이보다는 서양 관광객이 확실히 적다. 이를 단순히 상하이가 서양 조계지가 있었고 더 친서양 도시여서 그렇다고 설명하기에는 더 깊은 문화적 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항저우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면 그들 가운데 상하이를 은근히 무시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항저우 사람들은 상하이가 쉽게 말해서 근본이 없는 도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상하이는 19세기 서양세력으로 인하여 조계지가 발생하기 이전 중국 역사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는 아니었다. 반면, 항저우는 중국의 7개의 고도 중의 하나이며, 특히 남송시기에는 수도 역할을 하며 중국 문화의 중심지 역할까지 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항저우 사람들의 문화적 우월감은 상하이 사람들을 능가한다. 이는 마치 일본에서 교토 지역의 사람들이 도쿄를 문화적으로 얄팍하다고 은근히 무시하는 것과도 비슷한 상황처럼 느껴진다(적어도 현재에는 상하이와 도쿄가 더 큰 도시이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도시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항저우에서는 항저우 역사의 깊이를 느끼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중국의 대다수의 도시들이 그러하듯 중국 공산주의 시절에 전통적인 도시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던 이유가 있는데, 그보다 사실 더 큰 이유는, 최근 급속한 성장으로 인하여(마치 우리나라의 도시들이 겪었던 것 처럼) 역사적인 도시의 모습을 지켜나가기보다는 ‘개발’을 통해 자신들의 근대성을 증명하는 작업들이 진행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상하이에는 ‘고작’ 200년이 채 안된 건물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모습들을 간직한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반면, 항저우에서는 원형이 보존된 도시조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서호를 따라 올라가는 남산로 南山路에서는 온갖 종류의 수퍼카 매장이 즐비하며, 그 위로 호빈로(湖濱路)를 따라가도 온갖 럭셔리 브랜드 매장과 백화점이 즐비할 뿐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인사동 마냥 하방가(河坊街) 거리들에서 조금이나마 역사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마저도 너무 관광상품을 파는 상인들로 넘쳐날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지역이 예전의 모습을 그나마 유지하면서 남아있다는 점인데, 원래는 이 지역 역시 다른 곳들처럼 개발이 될 뻔했던 곳이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지금의 모습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 이 지역을 새롭게 정비하며 사람들에게 친숙한 도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의 건축가, 세계적인 건축가: 왕슈
이러한 정비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건축가가 항저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건축가 왕슈이다. 왕슈는 2012년 중국인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하였다. 이 연재 글에서 자하하디드, 노만포스터, 렘콜하스, SANAA 등 계속해서 프리츠커 수상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 만큼 이 상의 권위와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이전에 아이 엠 페이가 중국계 미국인으로 수상했던 것을 제외하면 그동안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유일하게 이 상의 수상자를 내던 국가였다(일본의 건축 수준을 보면 이 사실이 그닥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내심 일본 다음 아시아 내의 수상자는 한국 건축가가 된 가장 큰 계기는, 아무래도 그의 작업 방식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무소 이름인 ‘아마추어 건축 스튜디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작업에서 마치 아마추어처럼 실험하고 도전한다. 그 중에서도 재료와 건축의 구축방법에 대한 실험을 많이 하는데, 이 부분이 그의 건축을 여타의 현대건축가와 구분짓게 해주는 부분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진흙을 이용하여 건축을 한다던지, 주변의 공사현장(대부분 철거현장)에서 나온 벽돌 등의 폐자재를 이용하여 새롭게 입면을 구성한다던지 하는 실험을 지속적으로 한다. 동시에 중국 문화를 건축에 녹여내려고 하는 실험을 한다.
앞서 언급한 항저우의 전통거리를 새롭게 재생하는 프로젝트에서 왕슈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특히 남송어가 인근에 그는 중국 전통 정원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Scholar Rock을 모티브 삼아 작은 파빌리온들을 구축한다. 어찌보면 유치할 수 있는 전통의 차용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어반폴리를 통해서 왕슈는 그 거리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또한 그가 재직하고 있는 중국예술학교(China Academy of Art)의 여러 건물에서(그는 이 학교의 대부분의 건물을 설계했다) 중국 전통 지붕의 선을 살려 서양에서는 보기 힘든 아람다운 곡선의 중첩을 만들어냈다.
중국의 현대성:닝보 박물관
위와 같은 특징이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난 작품이 항저우에서 고속철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닝보에 있는 닝보 박물관이다. 항저우처럼 닝보 역시 오래된 역사를 지닌 도시이지만 이제는 현대적인 개발이 난무한 닝보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최근 중국은 많은 도시를 급속도로 개발하면서 그에 대한 자기합리화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각 도시들에 역사 박물관을 거의 필수 요소로 도입을 한다. 닝보박물관도 그 중 하나인데, 왕슈는 이 전통도시의 역사를 담는 박물관에서 중국 전통 건축재료를 새롭게 활용하고 새로운 형태의 옥상정원을 제공함으로서, 서양의 건축가들에게 의존하여 지은 많은 다른 도시의 박물관과는 확실히 다른 유니크한 박물관을 설계하였다.
이 박물관의 규모는 생각보다 큰 데(사실 중국의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 닝보박물관도 필요 이상으로 크다) 이를 완화시켜주는 것이 입면의 재료들이다. 깨진 벽돌, 전통 기와 등을 이용해서 입면을 만들었는데, 재료가 모두 파편화된 것을 다시 가져다가 썼기 때문에, 재료와 재료가 성글게 이어지며 입면이 거칠에 느껴지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마치 이 박물관이 역사와 함께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며, 커다란 덩치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자잘한 텍스쳐에 관심을 두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의 국립박물관과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중국의 영향인지 몰라도, 우리나라 역시 종종 필요 이상으로 공공 건축 물의 규모를 키우는 경향이 있는데, 국립박물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국립박물관을 멀리서 보았을 때 압도되는 효과(긍정이던 부정이던)는 매우 강렬하다. 반면, 박물관으로 다가갔을 때, 우리가 직접 경헙할 수 있는 스케일의 무어가가 조금은 부족해보인다. 물론 다른 상황에서 다른 개념으로 설계된 서로 다른 두개의 건물이지만, 건물의 위용이 아닌 방문객의 체험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닝보박물과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가 있다.
옥상의 정원역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옥상 데크와 몇몇 나무들이 아니라, 하나의 도시 속 골목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도시를 향한 뷰 역시 사방이 휑하니 뚫린 것이 아니라, 옥상에 위치한 매스들에 의해서 조심스레 규정된다. 그래서 옥상이 모든 전시를 보고 난 이후에 추가적으로 구경하거나 쉬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전시 시나리오에 포함되는 것이다. (물론 옥상에서 나와 모는 풍경은 대부분 현대화된 닝보의 모습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닝보복물관의 전시내용이나 방식은 미숙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마치 중국의 공항을 갔을 때와 비슷한데, 겉으로는 웅장하고 화려하기 그지 없는 세계적인 공항이지만, 그 안의 시스템을 보면 아직도 합리적이지 않은 곳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많은 중국의 박물관이 ‘박물관이 있다’라는 존재의 이유 이상의 무엇인가를 아직은 제공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닝보박물관 역시 닝보의 역사로 그 큰 박물관을 모두 채우기는 부족한 듯이 보이고, 아직까지 다른 선진국들처럼 박물관이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이용되는 수준은 아닌듯하다. 그러하다보니 박물관의 공간을 경험함에 있어서도 좋은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긴장감이나 타이트함을 느끼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왕슈의 대표작임과 동시에 그에게 프리츠커 상을 안겨준 작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작품이 최근 건축이 국제화됨에 따라 종종 잊게 되는 건축의 지역성이라는 부분을 심도있게 고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지역의 재료를 쓰고, 구축방법을 쓰고, 또 공간을 재현하면서, 건축이 제공하고 또 정의할 수 있는 그 지역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닝보박물관은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늘 들어 알고 있듯이 “우리의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을 실현한 박물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