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NICE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No. 182

NICE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No. 182

영화 속의 도시, 그리고 도시 속의 건축 <제로 포커스; 가나자와>

임동우

미국의 두 개 도시와 유럽의 두 개 도시를 돌았으니, 이제는 아시아의 도시와 건축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시아의 도시와 건축을 이야기 함에 있어 역시 일본을 빼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근대 도시화가 가장 먼저 발달한 곳이기도 하고, 건축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라고 일컫어지는 프리츠커 상 Pritzker Architecture Prize 수상자를 7명으로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 워낙 쉬워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몇몇 도시들은 간혹 우리나라의 도시들보다 더 친숙하기도 한대, 오늘은 한국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가나자와와 이 도시의 1950년대가 배경이 된 영화 <제로 포커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제로 포커스>는 우리에게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 등으로 잘 알려진 감독 이누도 잇신의 2009년 작이다. 이 작품은 원래 추리소설 작가로 유명한 마쓰모토 세이초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은 일본의 2차대전 패망 이후 미군정을 지나 일본의 경제가 다시 활황을 맞이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의 가나자와이다. 가나자와는 도쿄에서 북동쪽, 동해에 면한 도시로서 미군정을 거치면서 미군기지와 한국전을 위한 군수물자등이 생산되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앞서 가나자와는 2차대전 중 미군의 폭격을 받지 않아 예전 도시의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는 일본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패전 후 사회 경제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일본의 모습을 함축해서 보여주기에 가나자와는 꽤나 적합해 보인다. <제로 포커스>에서는 한 남자와 세 명의 여자의 삶을 통해 당시 일본의 사회 변화를 투영시킨다. 각기 다른 네 명의 주인공들, 즉 사다코, 사치코, 하다코, 그리고 켄이치는 서로 다른 각자만의 방식으로 전쟁을 기억하고 이를 회복하고자 한다. 영화는 이 각기 다른 방식의 회복 가운데 발생하는 긴장과 충돌을 기본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쟁 중 동료들을 잃은 켄이치는 전쟁 직후 미군정 하에서 경찰을 하던 시절 알게된 팡팡걸, 즉 매춘부와 조용한 시골 가나자와에 가서 살면서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후 켄이치는 도쿄에서 만난 규수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이별하고자 한다. 한편 팡팡걸이었던 하다코는 시골 어촌에 정착하여 세상과는 한발짝 멀리하며 소박하게 살며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고, 사치코는 오히려 세상 속에 들어가 전쟁을 통해 잃었던 자신의 정체성과 명예를 보상받으려 노력한다. 반면 도쿄의 규수 사다코는 오히려 이 모든 전쟁의 아픔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고, 전쟁이 가져다준 상처 따위는 없어 보인다.

최근 광복 70주년과 일본의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우리나라의 일본에 대한 사회적 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영화는 사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제로 포커스>는 전쟁과 미군정을 통해 상처받은 일본 사회를 철저히 피해자 입장에 놓고 영화 속 개인들을 통해 이를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여성시장”이 선출되는 소재를 통하여 과거를 넘어 새로운 사회로 발돋움하는 일본 사회를 그리고 있다. 결국 전쟁의 주체가 전쟁의 피해자로 뒤바뀌고, 이를 극복한 개인과 사회가 맞이하는 새로운 시대가 반영되어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를 통한 역사관이라던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라는 거시적인 영화 외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영화를 본다고 하면 꽤나 흥미로운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일본과의 특수한 관계에 있어 우리나라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는 있지만, 영화 자체로만 본다고 하면 충분히 우리나라의 전후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부분도 많다. 우리나라 역시 식민통치와 전쟁을 겪으면서 각 개인이 감당했어야 하는 역사적 트라우마와 그것을 극복했어야만 하는 과정이 많이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는 이를 이용하고, 누군가는 그 트라우마 마져 없었던 시절을 우리도 겪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쓰모토 세이초의 원작 소설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는 가운데 계속해서 마치 어릴적 읽었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의 영화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 만큼 감독인 이누도 잇신 역시 스릴러물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면서 (고로 2009년 영화치고는 조금은 옛스러운 느낌의) 영화를 완성한 듯 하다. 한 가지 아쉬운점이 있다면, 이 원작이 오히려 드라마로 연출되었으면 영화 속 각 개인의 이야기들에 한 껏 빠져들기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영화의 두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은 이 네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들을 깊이 담기에는 조금 버거웠던 것 같다.

<가나자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닌 도시>

영화 속 배경은 가나자와이지만 사실 영화 속에서 가나자와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우선 1950년대가 배경이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아는 가나자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가나자와는 미군의 폭격을 피했던 도시이고, 또 19세기 중반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일본에서 서너번째로 크게 성장했던 도시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때문인지, 가나자와에 가면 오히려 교토처럼 일본의 전통적인 도시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또한 도쿄나 오사카와는 다르게 일본 작은 도시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지방의 소도시들이 대도시보다 “덜” 발달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은 지방 소도시에서 대도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난 수백년간 왕조를 거치며 모든 인프라와 조직들이 서울에 집중되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와, 봉건제가 발달하여 지방자치가 오랜간 형성, 발달해온 일본의 정치적 역사의 차이때문이다.

가나자와는 1500년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마에다 도시이에가 이 지역을 관할하면서 발달하기 시작한다. 이후 근 300여년간 마에다 가문이 가나자와를 지배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많은 전통기술과 전통문화들이 강력한 다이묘의 후원하에 발달하였다. 당시 마에다 가문이 거했던 성이 가나자와 성인데, 이 성 주변으로 발달한 공원이 일본 3대 공원이라고 하는 켄로쿠엔이다. 마에다 가문이 여러 시대에 걸쳐 완성한 대표적인 다이묘 공원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낯익은 중국 쑤저우의 정원들이 연상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구릉지를 품고 있는 켄로쿠엔이 훨씬 더 자연의 깊이감이 있어 좋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인공적인 자연을 묘사하는 중국식 정원이나 일본식 정원보다는, 창덕궁의 후원처럼 자연 그 자체를 품고 있는 한국의 정원을 선호하는 편인데, 켄로쿠엔은 일본과 한국의 정원 그 어디쯤이라고 느껴진다.

오래된 역사의 켄로쿠엔과 함께 가나자와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 우타츠야마 공예공방이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가나자와는 강력한 다이묘 덕분에 안정된 정치아래 많은 전통 문화와 공예가 발달한 도시였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노력이 우타츠야마 공예공방이다. 이는 도쿄나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와는 경쟁할 수 없는 지방의 작은 도시가 어떻게 하면 자생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 것인가와도 연관되어있다.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아웃렛 몰이나 놀이시설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가나자와가 갖고 있던 전통의 색깔을 더 드러내서 이를 활용하는 것이다. 가나자와는 현재 유네스코의 창조도시 네트워크에 포함된 도시이다.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이러한 전통 공방과 예술을 확대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것이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이다. 이는 7명의 일본인 프리츠커 수상자 중 유일한 2인 팀인 SANAA의 2004년 작품이다. 미술관의 타이틀에 특정 시기를 붙인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마치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은 가나자와 문화 예술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처럼 읽힌다. 이 작품의 건축가인 SANAA는 Kazuyo Sejima(가즈요 세지마)와 Ryue Nishizawa (류 에 니시자와)가 한 팀으로 활동하는 건축사무소이다. 아마 한국에서는 굵직한 프로젝트를 한 적이 없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은 아니겠지만, 세지마는 얼마전 소개한 자하 하디드와 함께 세계를 대표하는 여성 건축가이기도 하며, 최근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고 광주비엔날레에 파빌리온을 설계하고 있는 일본의 대표 건축가 도요 이토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한편 니시자와는 세지마의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세지마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고 파트너로 영입된 능력자이다. 이 팀은 일본 국내 뿐만 아니라 최근 프랑스 랑스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 뉴욕의 뉴뮤지움 등 굵직한 국제프로젝트를 통해 일본의 미니멀한 색채를 보여주며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팀이다. 아마도 도쿄의 대표적인 명품 거리인 오모테산도를 가본 사람이라고 하면 SANAA의 크리스챤 디올 건물을 기억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을 처음 가 보는 사람은 원형인 이 미술관의 형태에 가장 처음 놀랄 것이다. 우리가 늘 익숙하게 마주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박스 형태의 무거운 느낌의 건물들인데, 이 미술관은 형태도 원형인데다가 심지어는 유리로 되어 속 안이 다 보이게 설계되었다. 게다가 가나자와를 대표하는 미술관인데도 불구하고 대단한 상징성이나 위압감 역시 없다. 우리나라 개인 미술관/박물관을 제외하고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지방의 미술관/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 그 곳들을 상상해보라. 아마 100미터 전방에서부터 “나는 미술관”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은 건물 앞에 도착할 때까지 본인이 미술관에 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원형의 건물에 나 있는 많은 출입구들은 무엇이 주된 출입구인지 헷갈리게 만들기까지 한다.

이는 SANAA가 지향하는 열린 미술관, 그리고 민주적인 공간 만들기때문이다. 우리가 원형탁자 이론에서 잘 알고 있듯이, 원형은 위계를 파괴한다. 즉, 원형의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은 하나의 주출입 동선이 아니라, 어느 방향에서 진입하여도 되고 투명한 유리는 그 모든 방향에서 오는 방문객과 도시의 모습들을 열린 미술관으로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각 갤러리의 각기 다른 크기의 박스들은 기능적으로는 햇빛을 차단해주는 밀폐된 공간의 역할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위계를 무너뜨린 공간을 구성하기도 한다. 즉, 기존의 미술관/박물관처럼 하나의 위계상에서 주요공간과 부속공간이 규정된 동선상에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박스들은 방문객이 자유롭게 오다닐 수 있도록 구성되어, 방문객은 위계가 파괴된 민주적 공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SANAA가 이후 설계한 뉴욕의 에서도 잘 나타난다. 가나자와에서처럼 넉넉한 필지는 아니지만, 제한된 뉴욕의 필지 안에서 방문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갤러리들이 각각의 독립된 공간으로 체험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필자가 이 작품을 좋아하고 감동받았던 이유는, 당시에 국내에서 박물관 설계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우리 팀은 ‘열린 박물관’에 대한 개념을 실현시키고자 노력을 많이 했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현실적인 이유때문에 여타의 박물관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물이 나오긴 했지만, 늘 ‘열린 박물관’에 대한 갈망이 컸고, 그러한 마음 가운데에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을 접했기때문에 그 감동이 더 컸던 것 같다. 많은 지방자치 단체에서 아직도 ‘열린 박물관’을 지향하며 여러 프로그램들을 개설하고 시민들과 함께하는 노력들을 기울인다. 매우 긍정적인 방향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 편, 또 한 편으로는 이보다 앞서 ‘열린 박물관’이 어떠한 공간으로 구성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공간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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