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NICE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No. 181

NICE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No. 181

영화

임동우

두 번째 유럽의 도시는 베를린이다. 이는 도시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를린>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에게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매우 익숙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독일 영화 중에 하나였을 듯한 톰 튀크베어 감독의 1998년 작<롤라 런>이라덜지, <베를린>이 벤치마킹 한 <본 시리즈>의 2탄 <본 슈프리머시> 정도가 순간 떠올릴 수 있는 영화일 듯 하다. 아마도 우리에게 베를린은 아직도 ‘베를린 장벽’, ‘분단의 역사’ 정도로 기억되는 도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도 한반도의 정세와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베를린의 분단의 역사에 이 도시의 전쟁의 기억이 덮이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인의 베를린에 대한 선입견 아닌 선입견 때문인지 류승완 감독은 남북을 다룬 첩보물의 배경으로서 베를린을 선택한다. 냉전시대의 이미지때문인지 베를린에 각국의 정보원들을 등장시키며 영화가 전개되는데, 아마도 더 이상 베를린은 냉전의 최전방이 아니라 냉전이 사라진 이후의 공허함이 남은 도시로 이해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갖는 제이슨 본이 등장하는 <본 시리즈>의 배경으로는 베를린만한 도시가 없을 것 같다)

류승범, 하정우, 한석규, 전지현 등 출연배우의 이름만으로도 관객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 영화는 남북 정보원들을 중심에 놓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그 이면의 이야기 등을 풀어나가고 있다. 이미 한국관객들은 을 통해서 남 과 북을 선 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경험했고, <본 시리즈>를 통해 누가 진짜 선이고 누가 진짜 악인지 모르겠는 상황에 놓이는 영화들도 경험했다. 냉전이후 영화들은 확실히 선과악이 불분명한 이 문제를 어떻게 잘 이용해 녹여내는가에 따라 이야기 구성이 탄탄해질 수도 아니면 엉성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베를린>에서도 북한의 공작원 표종성 중좌역을 맡은 하정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니, 아무리 최민식이 훌륭한 연기를 펼쳤어도 남자주인공은 한국의 정보요원 한석규였어야만 하는 1999년 작 <쉬리>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나저나 <쉬리>의 공작원 한석규를 <베를린>에서 다시 캐스팅 한 것은 신의 한 수 였다고 생각한다. 이 캐스팅 하나로 관객들은 한석규의 이전 캐릭터와 지금 캐릭터를 중첩시키며 냉전 때와 달라진 시대의 변화를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북한의 정보요원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 요즘들어서는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2014년 작 <용의자>나 2012년 작 <간첩>, 혹은 조금은 희화화 되서 나온 2013년 작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 북한의 공작원 등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관객의 감정이입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익숙하다. <베를린>에서 역시 관객은 주인공인 하정우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속한 집단보다는 한 개인에게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포스트냉전시대 액션 영화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여러나라의 정보기관이 등장하는 것이 조금은 산만해 보이고 전반적인 이야기가 짜임새가 떨어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이는 감독의 말처럼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 김정일이 사망함으로서 많은 부분을 수정했어야 했다고 하는 상황때문이었다고 관대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다.

류승완 감독은 필자가 대학시절 우연히 보게 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장편영화 데뷔를 했다. 벌써 15년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영화에서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흑백영화였다는 점, 양아치 역할을 한 류승범, 그리고 몇몇 씬이 필자가 살던 압구정 동네에서 촬영되었다는 점이 아직도 기억난다. 당시에 흑백영화를 볼 일이 거의 없었기에 인상적이었고, 양아치 역할의 류승범은 연기가 아닌 실제 양아치를 섭외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의 이후 영화들, <짝패>나 <부당거래> 등에서 보이듯 일상적인 도시 공간에서의 액션은 그의 데뷔작에서부터 나타나는 특징이다. <짝패>의 명동 액션신은 아마 영화를 보았던 보지 않았던,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액션신일 것이다. 액션신 자체의 완성도도 중요하겠지만, 아마도 ‘명동’이라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공간에서 일어난 액션이기 때문에 그만큼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베를린>에서의 액션들을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 아니다 보니 액션신이 파편적으로 기억된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그러하다) <본 시리즈>이후 액션 영화에서 유행이 된 좁은 공간에서의 격투신이라덜지,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권총을 거꾸로 들고 하는 격투신 등이 기억에 남는다. 앞 서 언급한 <짝패>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등에서 보이던 영화 속 도시의 공간은 기억에 많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 중에서 그래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씬은 하정우와 한석규가 건물의 옥상을 넘나들며 추격하는 씬이었는데, 이 때 베를린의 전경이 가장 잘 표현된다.

변화하는 도시 베를린

베를린은 여전히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도시이다. 전쟁 후에는 전후 복구라는 목적하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통일 이후에는 새로운 독일의 수도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인프라와 건물들이 신축 또는 개보수 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유럽의 경제 침체기 속에서도 거의 유일무이하게 건설이 꾸준히 진행되던 몇 안되는 유럽 도시 중 하나가 베를린이다. 베를린은 18세기 프러시아 제국시절 여러 개의 작은 도시들을 하나의 베를린으로 엮으면서 근대도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베를린 사람들은 각 지역별로 지역적 특색이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서울의 강북과 강남의 정취가 절대 같아질 수 없는 그런 분위기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많은 유럽의 도시들이 그러한 것처럼 베를린 역시 6~7층의 낮은 건물들로 도시가 구성되어있다. 콘크리트가 건물의 주된 재료로 사용되기 이전 발달한 도시들에서는 석조건축이 지탱할 수 있는 효율적인 높이인 6~7층이 가장 합리적인 건물의 높이였고 이것이 파리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도시의 스카이라인을 결정한다. 이는 전쟁 후, 혹은 통일 후 건축공법에 의한 한계가 크지 않았던 베를린에서마저 도시의 경관을 지키기 위해 따르는 일종의 룰(Rule)역할을 하였다. 아마 통일 후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 떠올랐다고 볼 수 있는 포츠다머 플라츠 프로젝트에서 역시 베를린의 스카이라인과 새로운 고층건물을 어떻게 조화롭게 배합할 것인가 고민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도시의 밀도라는 것을 무조건 높이로만 해결하려는 서울이나 상하이 같은데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베를린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앞서 언급한 <베를린>에서 기억에 남은 장면인 옥상에서의 추격신이 가능했던 것이다.

꾸준히 변화하는 베를린이기에 건축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베를린 만큼 답사하기 좋은 도시도 드물다. 근대 뮤지움 타이폴로지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Altes Museum이 있는 곳도 베를린이고, 근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 로에의 불후의 역작 National Gallery 가 있는 곳도 베를린이다. 또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카라얀이 지휘하던 베를린 필의 공연장으로 잘 알려진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 홀 역시 건축가들에게 추앙 받는 한스 샤룬의 작품이라 꼭 답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뉴욕의 소호처럼 통일 이후 예술가들의 스튜디오가 밀집하고 갤러리들이 많아지기 시작한 이전 동베를린 지역의 구역, 기찻길 밑으로 이어지는 상점들과 펍 등 도시의 정취를 느끼기에도 베를린만큼 좋은 도시가 드물다.

베를린은 파리, 런던, 로마 등과 함께 유럽에서도 몇 안 되는 대도시이다. 그리고 여전히 도시 곳곳에 많은 공사용 크레인이 설치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유럽도시 중에 하나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우리가 베를린의 분단의 역사에 비해서 이 도시의 전쟁의 역사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2차대전 말기 약 360여 차례의 공습이 있었고, 미공군과 영국공군으로만7만 톤의 폭탄이 투하되었던 도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베를린의 아픔은 냉전의 분단보다도 전쟁의 아픔일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 역시 당시의 폭격 맞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전쟁의 기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라이흐슈타그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 건물 이외에도, 전쟁 중 학살될 유태인들을 기리기 위하여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 설계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공원, 또 그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한 유태인 박물관 등 베를린에는 전쟁을 되새기고 반성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도시 곳곳에서 보인다. 물론 이들이 전쟁 발발의 주체이기는 하였지만, 이들이 전쟁을 되새기는 방식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대규모의 전쟁기념관을 도시 한복판에 건축하여 전쟁을 기념하는 서울의 방식과는 사뭇다르다. 서울의 전쟁기념관은 오히려 평양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전쟁의 흔적 New Parliament Building Dome (Reichstag Building Dome)

아마도 라이흐슈타그 건물만큼 독일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물도 드물 것이다. 통일독일제국이 건립되던 19세기 후반에 통일독일 의회당 건물로서 공모전을 통해 건축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이 건물에 큰 화재가 났는데 이는 한 네덜란드 공산주의자에 의한 방화로 밝혀졌고, 이로 인해 독일에서 공산당을 제치고 나치당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다. 독일 나치정권 시절에는 의회당의 기능을 상실한 채로 남아있던 것이 전쟁 중 폭격을 맞은채로 냉전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이 건물은 서독지역에 위치하기는 하였지만, 베를린 장벽이 바로 옆을 지나감에 따라 실질적인 재건은 못한채 통일 독일 시대를 맞이 한다. 이후 베를린에 통일독일 의회를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건축가 노만 포스터 (Norman Foster, 1935년 생)가 이 건물 재건을 맡게 된다.

노만 포스터는 영국에서 Sir라는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그래서 보통 Sir Norman Foster라고 불리운다) 그만큼 건축가로서는 영국에서 대단한 입지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작품이 없어 건축 전공자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이름일 수도 있지만, 런던 대영박물관의 중정위에 유리로 된 천정이나, 런던 신시청사, 또는 최근 미국의 애플 신사옥을 설계한 건축가라고 하면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이 노만 포스터는 유리와 철제 디테일을 잘 쓰는 건축가이다. 그는 라이흐슈타그 레노베이션을 하면서 가장 중점에 두었던 부분이 폭격때 사라진 돔 부분이었다. 이 돔을 이전의 방식 그대로 살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유리와 철을 이용하여 과거보다는 미래의 새로운 돔을 설계하였고, 이는 제국주의 시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돔이 아니라 대중이 방문하여 경험하고 또 베를린의 경관을 볼 수 있는 공공의 장소로 치환하였다.앞서 언급하였듯이 베를린은 대부분 6-7층의 저층 건물들이 주를 이룬다. 게다가 도시가 대부분 평지기 때문에 조금만 높은 곳에 가도 베를린의 전경을 볼 수 있다. 15층이 채 되지 않는 높이의 라이흐슈타그에서 도시를 전망한다는 것은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에서 시카고의 도시조직을 내려다 보는 것과는 다르지만, 은근 도시의 지평선 같은 느낌을 주는 색다른 매력이 있다.

돔이라고 하는 건축적 언어는 서구문화에서 상당한 상징성을 갖는다. 로마의 판테온에서도 나타나듯이 (완벽한 구를 건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돔은 구를 대신해 현실 건축에서 나타낼 수 있는 이데아, 즉 하늘이었고 그만큼 신성하기도 하고 상징적인 형태 및 공간이었는데, 노만 포스터는 이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새시대의 의회당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서도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 원 설계안에서는 돔이 없었으나 당시 국회의원들의 요청 (혹은 압력)으로 억지로 돔 부분만 추가적으로 얹었다는 일화는 건축계뿐만 아니라 비건축인들 사이에서도 꽤나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이다. 두 가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날카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 당시 사회에서 건축가를 얼마나 하찮은 직업으로 생각하는지와 (그냥 한 두 마디로 설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또 하나는 심미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당시 정치인들의 눈 높이이다.

라이흐슈타그를 방문해본 사람은 느끼겠지만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방문 장벽이 낮고 가장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의회당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가기 위한 배를 탈 때 보다도 쉽게 독일 국회의사당을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곳을 다녀와 본 한국사람이라면 많이들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우리네 국회의사당 역시 이렇게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될 수는 없을까 하는. 아직도 초등학생들의 국회 견학은 많은듯 하지만, 자발적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제국주의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상징적인 건축물로 지은 라이흐슈타그를 대중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탈바꿈 시킬 수 있었던 것은 건축가의 노력도 있었지만 독일 정치인들의 노력도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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