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도시 보스턴, 미국의 정신을 엿보다
임동우
역사의 도시 보스턴
보스턴은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잘 알려져 있는 미국의 도시다. 사실 보스턴이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인데도, 한국인을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이유는 아마도 지역의 유수한 학교나 미국의 역사와 관련 있을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은 실제로 필라델피아에서 이루어졌지만,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 미국으로 넘어와 도착한 곳도 보스턴 인근의 케이프코드 곶이다. 이러한 태생적 배경 때문인지, 보스턴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되면 미국인들이 찾는 제1의 관광지가 된다. 그야말로 미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뉴욕의 화려함이나 샌프란시스코의 자유로움 등에 가려져 무언가 세련되지 못한 느낌의 도시로 보이지만, 보스턴은 그동안 미국의 도시 역사를 만들어온 주역이었으며, 현재도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보스턴은 미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대학교가 설립된 곳이고, 제일 처음 지하철이 도입된 곳이다. 최근에는 북미 지역에서 가장 큰 공사 중 하나였다는 빅 딕(Big Dig: 고속도로 I-93의 지하화사업) 프로젝트로 도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보스턴은 행정구역에 속하는 상당 부분의 땅을 간척사업을 통해 얻었으며, 산업으로는 집카(Zipcar)나 페이스북과 같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태동한 곳이기도 하다. 작은 도시이지만, 이러한 다양성과 역동성이 있어 그런지 제인 제이콥스는 물론이고, 케빈 린치(Kevin Lynch),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 등 여러 도시학자들은 보스턴을 참고하여 이야기들을 많이 풀어낸다.
그런 반면, 보스턴은 영화의 배경으로 그다지 각광받는 도시는 아니다. 뉴욕이나 시카고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서부의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의 도시도 아니다. 그나마 보스턴을 배경으로 한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로는 <러브 스토리(Love Story)>를 비롯해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소셜 네트워크(The Social Network)>, <21> 등이 있다. 물론 이마저도 행정구역상으로는 보스턴에 접해 있는 케임브리지의 하버드와 MIT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긴 하다. 다만 최근 들어 보스턴에서 영화 관련 산업을 지원하면서 이전보다는 많은 영화들을 보스턴에서 촬영하고 후반작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들은 애당초 영화사에 주는 인센티브를 고려해 배경을 설정해서 그런지, 그다지 보스턴의 정취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국내에서도 꽤 알려진 은행 강도를 다룬 영화 <타운(The Town)>은 과거 보스턴의 악명 높았던 찰스타운이라는 동네를 무대로 삼아 보스턴의 모습을 굉장히 잘 보여준다.
하지만 오늘 소개하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다. 우리에게는 홍콩영화 <무간도(無間道)>의 리메이크작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Leonardo Dicaprio)가 주연을 맡아 유명한 영화 <디파티드(The Departed)>이다. 또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리어리티의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가 감독을 했기에 더 관심이 가는 영화다. 게다가 브래드 피트가 제작했다는 사실은 덤이다. 사실 마틴 스코세이지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The Wolf of Wall Street)>,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 <에비에이터(The Aviator)> 등 만은 작품을 함께 했는데, <디파티드>는 어찌 보면 배우의 색깔이 가장 덜 드러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무간도>라는 느와르를 어떻게 서양 문화권에 녹여낼지를 상당히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력이 인정되어 2007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편집상 등을 수상했다(역시 남우주연상은 받지 못했다).
이민자의 도시들
감독은 돼 느와르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면서 시카고도 뉴욕도 아닌 보스턴을 택했을까. 그동안 수많은 갱영화가 시카고와 뉴욕을 배경으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왜 굳이 학자 이미지가 강한 보스턴을 배경으로 <디파티드>를 찍었을까. 아마도 이는 미국 역사에서 보스턴이 이민자들, 특히 영화의 등장인 물들이 주를 이루는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만들어낸 역사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며 이민자들 간의 경쟁과 암투, 차별이 만연한 나라이다. 그중 보스턴은 사실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197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차별과 인종 간 갈등이 가장 심했던 도시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종이나 출신 지역에 따라서 거의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이루고 살았고, <디파티드>는 그중에서도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모여 살았던 사우스보스턴 일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
보스턴과 아일랜드 하면 사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이다. 지금은 보스턴 출신 아일랜드계가 미국 정계를 주름잡고 있지만, 사실 예전에는 매우 폐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지금도 보스턴은 아일랜드계 출신이 시장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공공조직뿐 아니라 건설노동조합이나 상인조합 등 여러 계층의 단체들이 아일랜드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이는 <디파티드>의 출연자 대부분이 백인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보스턴은 경찰이건 갱이건 공무원이건 할 것 없이 대부분 백인, 특히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었고, 이는 영화 초반 빌리(리오나도 디캐프리오)가 경찰학교 흑인 동기에게 “넌 졸업하고 대책이 없을 거다”라고 말하는 한마디에 잘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백인 중심의 문화는 ‘보스토니안(Bostonian)’이라는 단어에도 잘 나타난다. 미국 동부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보스토니안이라는 단어에 담긴 특별함 많다. 보스턴 역시 역사의 시작부터 정치와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해서 그런지 매사추세츠주의 주도를 맡고 있으며, 이는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기도 한다. 영화에서 콜린(맷 데이먼, Matt Damon)은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 금박의 돔이 있는 건물을 보며 흐뭇해하는데, 바로 이 건물이 스테이트 하우스, 즉 매사추세츠주의 주청사 건물이다. 이는 콜린의 성공에 대한 욕망과 야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데, 그가 새로 이사한 동네가 바로 비컨힐이다.
비컨힐은 보스턴의 가장 오래된 지구, 네이버후드(Neighborhood)로 인구가 채 1만 명이 되지 않는다. 이 지역은 보스턴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이며 정치의 중심지다(보스턴의 네이버후드는 행정구역이 아니라 문화 · 역사적 영역으로 볼 수 있다.영화의 배경인 사우스보스턴 역시 행정구역이 아니라 네이버후드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존 케리(John Kerry) 민주당 상원의원[공화당의 조지 부시(George Bush)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은]이 사는 동네이기도 한 이 비컨힐은 그 이름처럼 높은 언덕이 있던 지역이었다.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낮아진 것이라고 한다. 보스턴 정착 초기에 많은 간척사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당시 비컨힐을 깎아 토사를 공급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 이 토사로 새로운 땅을 만든 지역 중 하나가 백베이라는 지역이다. 이 백베이 역시 부동산 가치로는 보스턴에서 1,2위를 다투지만, 역사적인 가치가 있어서인지 여전히 비컨힐이 보스턴에서는 가장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이름을 날린다. 이 두 지역 모두 붉은 벽돌로 된 빅토리안 스타일의 집들이 많아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고, 특히 가을에는 더욱더 깊은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백베이와 비컨힐이 보스턴의 역사와 전통을 대변하는 지역이라고 하면, 영화의 배경인 사우스보스턴은 당시로서는 새로움을 대변하는 지역이다. 지리적으로도 중심지에서 꽤나 떨어진, 당시로는 신도시와 같은 지역이었다. 주택 공급 부족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짧은 기간에 많은 주택을 공급하여 사람들이 이주하게끔 한곳이었다. 그 때문에 사우스보스턴은 백베이나 비컨힐과 같은 정취가 없다. 벽돌보다는 나무사이딩으로 집을 지었으며, 트리플데커라는 보스턴에서 유행한 다가구주택으로 조성한 지역이기도 하다. 중산층이나 저소득층이 집을 소유할 수 있도록 아주 싸게 집을 공급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다지 주변 환경이 좋은 곳은 아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대략 예상을 하셨겠지만, 갱단의 두목 코스텔로(잭 니컬슨)가 활동하던 이 사우스보스턴 지역은 그다지 안전한 동네가 아니었다. 이는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찬가지여다. 보스턴에서 늘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지역 중 하나였으며, 외부 사람들에게 매우 배타적인 동네로 유명했다.
회복의 도시, 그리고 화합
사우스보스턴은 2008년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오히려 새로운 동네로 거듭나는 중이다. 서민층이 대출을 받아 집을 사서 살던 이 지역은 경제위기가 닥치자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지역 중하나가되었다. 이는 어떤 이에게는 고통이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기회였다. 이 배타적인 동네에 외지인(여기서의 외지인은 외국인이 아니라 사우디를 제외한 다른 보스턴 거주자들을 말한다)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긴 것이다. 경매나 매매를 통해 수많은 트리플데커, 혹은 더블데커들이 팔려 새로운 중산계층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새로운 중산계층으로는 지식층이 많았다. 비슷한 시기에 보스턴과 그 인극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BT(바이오 테크놀로지) 산업 클러스터가 생겼고, 또 사우스보스턴에는 이노베이션 지역이 들어와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고, 사우스보스턴은 이들을 위한 주거 지역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계층이 들어오자 지역에는 새로운 카페와 레스토랑이 생기고, 그와 함께 지역 주민들의 삶의 환경은 조금씩 개선되었다. 보스턴의 대학교수가 된 필자의 한 혹인 친구도 몇 년 전 이 지역으로 집을 사서 들어갔다. 사실 이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보스턴에 사는 흑인 대부분은 도체스터 혹은 럭스베리라는 지구에서 사는 것이 당연시될 정도로 보스턴은 인종에 따라 사는 지역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경제위기를 계기로 새롭게 재정립되며 이종 간 혹은 계층 간의 뒤섞임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도시를 직접 다루는 영화는 아니지만, <디파티드>를 보면 보스턴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사회적 배경을 공간적 배경에 잘 녹여낸다. 리얼리티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아마도 이 도시적 리얼리티를 영화에 잘 녹여내고 싶었던 듯하다. 사실 보스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 영화에 나오는 사회공간적 배경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주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세이지 감독은 인물의 대사로 다 담아내지 못하는 환경이나 욕망, 상황 등 여러 가지 요소를 배경에 녹여내어, 만약 당신이 보스턴에 대한 역사와 지식이 있다면 그 영화적 장치에 푹 빠져들게 만들었다. 보스턴을 다녀와 본 사람에게는 한 번쯤 추천해 보고 싶은 영화이고, 또 영화를 본 사람에게는 보스턴 여행을 꼭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