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건축평단 - 건축비평공동체

건축평단 - 건축비평공동체

Koreanism: 단일민족 증후군과 정답 찾기

임동우

필자가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주제로 글을 부탁 받았을 때 들었던 생각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음… 또?’ 였고 다른 하나는 ‘왜 나지?’ 였다. 첫 번째 생각은 본디 필자만 갖는 생각은 아닐 듯하고,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키워드가 그닥 생소한 석이 아니기 때문에,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어디선가 이러한 주제의 담론이 있을 때면 나오는 즉각적인 반응이 아닐까 싶다. 반면 두 번째 반응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이 스쳐 지나감에 따라 나온 반응이었다. 스스로를 보았을 때 필자는 이 담론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역사가나 이론가도 아니고, 이 키워드를 중심에 놓고 실무를 진행하는 건축가도 아니고, 이 주제를 담론화 시킬만한 능력을 지닌 평론가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는 어마무시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는 ‘나이’라는 변수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에 속하는 필자가 기성 세대로부터 ‘전수’되어 오고 있는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주제로 공식 매체를 통해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에는 많은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자칫 조그마한 비평이 이 담론을 진지하게 담아내던 건축가나 이론가들을 ‘공격’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축평단’이 다양한 담론을 담아내는 플랫폼이라는 기대를 하며,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는 관점을 풀어놔 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하였 듯이,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주제는 생소하지 않다. 필자의 경우, 20여 년 전, 건축을 처음 시작한 이래 지속해서 잡지를 통해 접하기도 하고, 교수님들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같은 학도, 동료들과 거친 토론을 통해 스스로 의견을 내기도 하였다. 이는 단지 우리 세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건축계에서 세대 구분이 어찌되어야 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이전 세대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며, 더 이전 세대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으로는 1960년대 김수근의 국립부여박물관 왜색 논란 때부터 (아마도 한국 건축의 전통성에서 시작했을)건축의 한국성이라는 담론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왜색’ 논란이라고 하는 것이 재미있다. ‘왜색’이 아니라. 아마도 ‘외색’이 아니라. 아마도 ‘외색’이었으면 논란도 없었겠지만)아무튼 이후에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이 주제가 한국 건축의 담론에서 빠진 적은 없어 보인다.

그러면 이러한 질문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다른 나라들은 어떠한가? ‘건축의 스페인성’, ‘건축의 일본성’, 아니면 정말 존재 물가능해 보이는 ‘건축의 미국성’ 이라는 담론이 다른 나라에도 각각 존재하는가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답할 수는 없다. 필자가 각 나라의 모든 담론을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주된 담론은 아니지 싶다. 굳이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과 비교할 이유는 없지만, 왜 한국에서는 건축의 전통성 혹은 한국성을 찾는 논의를 수십 년간 지속해오고 있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필자는 수준 미달의 큐레이팅이었다고 판단 하는)미국관은 지난 세기 동안 해외로 ‘수출’된 미국의 건축이라는 큰테마를 갖고 200여 개의 오피스와 1,000여 개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이로 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는 다양성 때문에, 사실 어떤 사무실을 미국 사무실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고, 200여 개의 건축사무소에는, 모두가 이견 없이, 미국 사무실이라고 규정할 만 한 사무실에서부터 ‘그게 미국 사무소였어?’ 라고 반문할만한 사무소까지 포함되었다. 그래서인지, 2016년 비엔날레에서는 미국 국적을 가진 건축가의 사무소만 참여할 수 있는 조항을 자격 요건에 넣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이 ‘미국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담론으로 확대되는 분위기는 아닌 듯 하다. 물론 다양성이 미국성일 수 있는 미국의 문화와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여러 사람이 동감하듯 한국에서 유독 ‘한국성’이라는 주제를 깊게 다루는 면이 없지 않다.

이는 두 가지 특면에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한국인이 순수 혈통, 족보 등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문화는 대체적으로 정답을 찾고 이를 일괄 적용하는 것을 최선으로 아는 문화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최근 들어 외국인의 한국 여행이 늘고, 국제 결혼과 다문화 가정이 늘면서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은 아무리 아이가 한국에서 태어나도 부모님 중 적어도 한 명이 한국 국적 소유자가 아니면 한국 국적을 주지 않는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이고 문화이다. 속인주의가 맞느냐 속지주의가 맞느냐 하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고, 한국에서 전반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문화적인 특성 중 하나가 이 단일 민족 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는 건축계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외국 건축가가 주요 공공 프로젝트를 하는 날에는 아마도 건축계분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도 배타적인 분위기가 만연할 것이다. 렌조 피아노와 리차드 로저스가 파리 한 복판에 퐁피두 센터를 설계한 것처럼, 왕슈나 도요 이토가 서울 한 복판에 국립도서관이나 미술관을 짓는 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이는 단지 혈통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건축가라 할지라도 ‘한국성’ 혹은 전통을 담아내지 못하면 뭇매를 맞기 십상아다.

또한 한국은 집단 지성을 통한 지식의 축적을 추구하는 ‘위키피디아’ 타입이라기 보다는 ‘지식인’이나 ‘파워블로거’ 등을 통해 누군가의 일괄된 지식을 전달받는 것을 선호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때문에 어떤 질문이나 주제에 관해서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쉽게 하고 하나의 관점을 두루두루 적용하기를 선호하는 것 같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처럼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튀는 것보다는 ‘정답’이라고 여기는 사회적 합의를 따르는 것이 제일 안전한 길로 여겨진다. 한 동안 한국의 건축계에서도 소수의 건축가와 그들의 스타일이 파워블로거 역할을 했고, 필자를 비롯해서 많은 건축학도들이 파워블로거의 팔로어가 된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학창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수업이 라파엘 모네오의 수업이었는데, 그는 그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건축을 하는 여러 현대 건축가의 작업을 보여 주면서 그 건축가들이 작업들에서 보여주고자 한 개념이나 이론, 혹은 가치가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이것이 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건축가나 이론만 공부한 이론가에 의한 강의가 아니라, 자기만의 언어 이외에는 모든 것을 비판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모네오라는 거장 중의 거장이 강의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거기에는 어떠한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열 명의 건축가가 있으면 열 개의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강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추구 vs. 드러남

건축의 한국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건축의 한국성을 논하는 것 차체는 상당히 건설적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논의가 그 동안 한국이라는 땅에서 혹은 (국적을 떠나 통칭)한국 건축가가 작업해온 방식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건축의 한국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틀이 되어 마치 한국인이라면 혹은 한국땅에서 건축을 할 것이라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인 것처럼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정답 찾기에 그칠 수 밖에 없다.

건축에서 한국성이라는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명쾌하게 정의내리지 못하더라도, 혹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멋드러지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정의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성이라는 것은 한국에서 그 동안 구축되어온, 또한 이루어지고 있는, 혹은 한국 건축가의 작업들을 통해 드러나는 공통된 분모로 인식을 해야 한다. 만약 한국성이라는 것을 앞으로 어떻게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목적 지향적인 키워드로 본다면, 이러한 인식은 상당히 배타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건축의 한국성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고결하고 건축적으로 매력적인 어휘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건축의 한국성이라고 하는 것이 공간의 구성과 재료의 사용, 구축의 방법 등 매우 건축적인 언어로서 정의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건축 방법론적인 키워드들로 건축의 한국성을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담론이 가진 태생적 한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왜색 논쟁으로 인해 건축의 한국성 담론이 시작되었다고 하면, 당연 이로 인해 ‘그러면 어떠한 디자인을 해야 이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건축 설계 방법론적인 질문이 함축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또한 ‘왜색’에 대응하여 ‘전통성’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이 ‘한국성’에 내포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전부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될 수 있으면 법적 허용 용적률에 맞춰 설계를 하는 (건축주의 요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습관’도 상당히 한국적인 건축 문화이다. 필자가 외국에 나와서 처음 실무를 할 때 미국인 혹은 다른 유럽권에서 온 친구들이 용적률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결국 누군가는 한국 건축에서 ‘드러나는’ 한국성 중에는 ‘용적률 찾아먹기’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한국의 아파트들을 보면서 한국의 건축성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파트만큼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것을 쉽게 모여줄 수 있는 유형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에게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발견한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경복궁도 국립박물관도 아니라 주유소 천장 캐노피에서 내려오는 주유 호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결국 그게 무엇이건, 어떻게 정의내려지건, 건축의 한국성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들을 어떻게 취합하고 필터링을 하느냐의 문제지, 추구해야만 하는 가치로서 보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性 vs. -ism

건축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는 OO성(性)이 아니라 이즘으로 설명된다. 모더니즘, 컨스트럭티비즘, 포스트 모더니즘 등 건축에서 수 많은 이즘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추구되는 것이다. 아무런 이론적 배경이나 명백히 추구하는 가치가 없이 모더니즘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작품을 통하여 모더니즘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이 정의되고 이를 추구하는 건축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만큼 이즘은 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추구하는 하나의 이론을 좇으면서 다른 것을 동시에 좇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과 이즘을 종종 헷갈려 하는 것 같다. 마치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가치를 찾아서 이것이 앞으로의 작업들에 적용되어야 할 이론으로 정립하고자 하는 부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새로운 작업들이 뭇매를 맞기도 한다. 최근 들어 더욱 자주 외국의 건축가가 한국 땅에 작업하는 경우가 있는데, 종종 그들의 작업이 ‘한국적이지 않다.’ 혹은 ‘지역성을 무시했다’라는 이유로 비판 받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 작업들에 대한 비평이 몇몇 단어들로 틀에 갇혀 버리면 더 이상 생산적인 비평이 될 수 없음을 우리가 알면서도, 이 과정이 늘 반복되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는 단순히 외국 건축가의 프로젝트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건축가가 한국땅에 프로젝트를 할 때에도 비슷한 잣대로서 평가 받을 때가 많다. 건축이라고 하는 것이 주변의 ‘물리적’인 맥락과 단절되어 있으면 비판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로 정의되기 힘든 ‘OO성’이라는 잣대로 건축을 판단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쳇바퀴를 돌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1. XX프로젝트 논란 2. 논란의 이유는 프로젝트의 OO성 결여 3. 과연 OO성이 무엇인가 4.정의된 OO성으로 다른 프로젝트 평가, 이러한 논리 과정을 거치는 듯 보인다. 매우 과장된 것일 수 있겠으나 한국에서 논란이 있었던 몇몇 프로젝트는 적어도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 같다. 결국 소수의 이즘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고 다양한 이즘이 공존하는 이 세대에서 평가의 잣대로서 OO성이 사용되는 것이다.

문제는 논의가 이렇게 전개되면 종종 한국성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 건축 언어로 변환되어 언어로 변환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국성을 추구한다는 명목 하에 건축의 본질과는 따로 노는 매우 독특한 요소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전통 문양에서 따온 패턴이 갑자기 등장한다든지, 전통 무용의 동작을 차용한 지붕이 등장한다든지 하는 등이다. 물론 이것들이 건축의 개념에 잘 녹아들어 있으면 그것이 무슨 문제이겠냐만은, 많은 경우 한국성을 표출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첨가된 것처럼 보인다. 더 근본적인 질문응ㄴ 과연 그 작품들이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한국성을 추구할 수 있었느냐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한구성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묻어나서 여러 다른 작품들의 공통 분모로서 후대에 드러나는 것이지, 현재 하나의 이즘으로서 적용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Koreanism이라는 말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건축의 조선성을 넘어서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키워드를 매우 염세적인 시각으로 다룬 듯 하지만, 실제로 한국의 건축가들이 건축의 한구성이라는 부분에서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건축의 한국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제서야 한국의 건축이 세계 건축의 담론과 흐름에서 동떨어지지 않고 같은 파도를 타고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몇 년 전 미국에서 한국의 현대 건축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전시와 출판을 접한 적이 있다. 이 전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국 건축에 문외한 건축인들에게 ‘한국성’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Topographical Syntax, Historical Transformation, Accelerated Density, Material Identity, Infrastructural Alliance 등 다섯 개의 키워드로 한국의 현대 건축을 소개하는 전시였다. 한국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한국성 (Koreanity?)이 무엇인지 보여주려고 집중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한국의 현대 건축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들을 세계 건축계에서 주로 등장하는 단어들을 활용해 재정립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성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얼마 전 모 잡지사에서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건축가들의 지형도를 만든다고 해서 참여를 한 적이 있다. 웹사이트만 하나 걸어 놓아도 독립 건축가로 소개되는 이 세대에, 어떻게도 아니고 어디서 활동하느냐가 뭐 그리 중요하겠느냐마는, 또 한편으로는 이들을 통해서 건축의 한국성이 언젠가는 드러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혈통’의 건축가들 중에는 한국 배경이 전혀 없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 한국에서 자라고 문화에 노출되었다. 이들이 활동하는, 한국이 아닌 곳에서 생산된 작업에서 어떠한 공통 분모만 뽑아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훌륭한 건축의 한국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어떠한 공통된 가치를 추구해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 한구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건축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시나 ‘어디서’ 활동하느냐가 주요한 문제는 아니다)여기서 세대론을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비교적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은 필자와 마찬가지로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주제에서 조금 더 자유롭지 않나 싶다. 참 아이러니하게 들리긴 하겠지만, 결국에는 이 주제에서 자유로워진 신신 세대가 기성 세대가 될 때야 비로소 진정한 건축의 한국성이라는 주제에서 조금 더 자유롭지 않나 싶다. 참 아이러니하게 들리긴 하겠지만, 결국에는 이 주제에서 자유로워진 신진 세대가 기성 세대가 될 때야 비로서 진정한 건축의 한국성이 무엇인지 드러날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건축의 조선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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